모차르트를 만들어낸 훌륭한 교사
모차르트(W.A.Mozart)는 지금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궁정음악가이자 교육자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대 유명한 음악가이자 교육자였기에 아들의 전무후무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린 모차르트의 재능을 어떻게 해야 발전시켜 나아갈지 잘 아는 그였기에 모차르트에게 가장 적합한 음악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훌륭한 교사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와 함께한 수차례의 연주 여행이었는데,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유럽 곳곳의 다양한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들을 접할 수 있었고, 어린 모차르트는 그것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냈다.
런던에서 알게 된 J.C 바흐(바흐의 막내아들)와 이탈리아에서의 마르티니 등에게서는 직접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만하임에서는 만하임 악파(스타미츠와 그의 아들)에게 당시 새로 태동하던 관현악 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직접적인 음악교육뿐만 아니라 여행을 하면서 다양하게 보고 듣는 것들 또한 어린 모차르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당시 여행이라 하면 지금처럼 차로 몇 박 며칠 다녀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차를 타고 집을 떠나 새롭고 낯선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기거하며 그곳 사람들처럼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때로는 최고로 호화로운 궁정에 방문하여 고위층 인사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하고, 때로는 길거리의 거지들이 구걸하며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기도 하고,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민요도 들었을 테고,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의 기교 넘치는 음악회도 감상하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레오폴트 모차르트라는 당대의 최고 음악교육자인 아버지를 통해 전무후무한 천재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탄생시켰다.
잘츠부르크에서 탄생한 멋진 작품
모차르트의 일생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천재음악가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잘츠부르크 시기와, 청년이 되어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난 비엔나 시기이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삶은 오랜 여행으로 몸이 고단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항상 아버지가 함께 있었기에 영육 간에 안정적인 시기였다.
그것은 그의 작품을 보아도 한 눈에 알 수가 있는데, 가톨릭 신자였던 모차르트가 쓴 20여 개의 미사곡 중에서 18개의 작품이 잘츠부르크 시기에 쓴 것이다.
1779년, 그가 23살 때 잘츠부르크에서 쓴 ‘대관식’미사 ‘KV.317'은 그가 쓴 미사곡 중에서 가장 장대하고 화려해서 일반 콘서트에서도 즐겨 연주가 된다. 총 6곡으로 구성된 이 곡은 kyrie(주여 불쌍히 여기소서)-Gloria(주께 영광)-Credo(신앙고백)-Sanctus(거룩하시도다)-Benedictus(복 있도다)-Agnus dei(하나님의 어린양)의 순서로 연주되며, 4부 합창과 4부 솔로, 그리고 비올라가 없는 고전 잘츠부르크 스타일의 오케스트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많이 불려져
미사곡은 원래 가톨릭 음악이었지만 이 곡은 지극히 예수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Credo(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사도신경 원문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현재 기독교 교회에서도 즐겨 연주된다.
또 Gloria(주께 영광)는 4분의 3박자-대부분의 모차르트의 영광송은 3박자로써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다장조 곡으로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총주로 시작하여 4성부의 솔로가 뒷바쳐주는 화려하고 힘찬 곡으로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를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다. 대관식 미사라 불리우는 이유는 황제 레오폴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는 미사를 위해 쓰인 곡이라 해서 그렇다. 우리 교회에서 성가대 찬양으로 올려진 구노의 장엄미사의 대영광송과 더불어 교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어지는 곡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