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독립군 영웅을 그린 영화도 아니고, 코미디 영화라고 하기엔 뭔가 여운이 남고, 그렇다고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영화이다.
1930년대,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만주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동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풍운아, 세 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맞닥뜨린다. 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분, 좋은 놈), 최고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분, 나쁜 놈), 잡초 같은 생명력의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 분, 이상한 놈).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윤태구가 열차를 털다 발견한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추격전을 펼친다.
정체불명의 지도 한 장을 둘러싼 엇갈리는 추측 속에 일본군, 마적단 그리고 독립군까지 이들의 추격전에 사활을 걸며 뛰어들게 되고, 영화는 점점 얽히고설키면서 복잡한 스토리를 엮어간다. 과연 이 지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는 내내 쫓고, 쫓기고, 죽고, 죽이면서 흥미감을 더해간다. 주인공들이 지도에 표시된 보물의 위치에 가까워지면서 펼쳐지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보는 관객들도 머리가 지끈거리게 된다. “대체 보물이라는 게 뭐야?”
영화는 어떻든 상업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예술성을 강조해도 상업성과 연결되지 않는 영화는 일단 환영받지 못한다. 관객이 있어야 영화산업도 살고, 영화산업이 살아야 예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영화의 철저한 ‘상업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철저한 상업주의 영화다. 속칭 헐리우드 블록 버스트 급 영화인 것이다. 장구한 스케일, 화려한 캐스팅 그리고 흥미진진한 구도로 이뤄진 그런 영화 말이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뭘까.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아무 양심 없이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신앙양심 없이 생활하는 우리와 같기 때문일까.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을 죽이는 데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통쾌해하고 즐거워하며 좀 더 코믹하게 죽어나가는 상황을 즐기기까지 한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 때문에 우리 양심이 어떻게 되어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영혼에 점점 무감각해져 가는 나의 모습이 꼭 영화 속 인물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영화처럼 웃다가 마는 것도 아니고, 죽으면 반드시 심판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유유자적 살아가다 영원히 죽고, 영원히 사는 문제에 무감각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무감각해지는 만큼 세상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고, 그것만큼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증거일터인데 얼마나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또 한 번 반성해본다.
인생의 보물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속이고, 또한 죽이면서까지 사투를 벌이다 죽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우리가 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을 위해 우리 인생을 바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신앙생활이 더 즐겁지 못하고, 더 유쾌하지 못하고, 더 유익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마다 가슴을 친다. ‘아!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여!’
위 글은 교회신문 <1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