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경’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42행 성경’은 한 페이지를 42행씩 두 줄로 배치하여 본문을 찍고 가장자리에 삽화와 채식장식을 그려 넣은 책으로, 최초로 활자로 인쇄한 성경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인쇄의 정교함이 여전히 현대인을 감동시킨다. 구텐베르크는 단어 사이의 공간을 활용하고 활자의 폭을 약간씩 다르게 하여 모든 행의 길이를 똑같이 맞춤으로써 텍스트 배열이 미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지금 현재 남아 있는 ‘42행 성경’의 완전한 사본은 전 세계적으로 단 3개뿐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사람의 손으로 쓰는 성경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판본마다 제각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쇄본은 일단 활판을 제작해 놓으면 동일한 형식으로 여러 판본을 만들 수 있으므로 똑같은 책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다. 사실 인쇄기와 유성잉크를 통해 조판된 활판을 종이에 압착시키는 방식이 개발된 것은 당시 유럽의 종이기술이 동양보다 떨어진 탓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한지는 흡수가 잘되어 먹물을 활판에 묻혀 살짝만 문질러줘도 깨끗하게 인쇄되기 때문에 굳이 기계적 장치가 필요 없다. 하지만 유럽의 종이는 두껍고 투박하여 회전나사를 이용해 엄청난 힘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인쇄가 잘되지 않는데 그것이 거꾸로 대량인쇄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인쇄기를 발명하기 위해 많은 돈을 빌렸는데 성경 인쇄의 성공에도 그간 투자된 손실을 회복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 적자상태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교회의 의뢰를 받아 면죄부, 달력 등을 제작했지만 결국 빚 때문에 공장을 몰수당하고 인쇄기도 빼앗긴다. 인쇄술의 발명가는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마인츠 대주교의 후원에 의존하여 쓸쓸히 일생을 마친 반면, 그의 투자자는 인쇄기를 개량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밑에서 새로운 인쇄술을 터득한 기술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인쇄술은 전 유럽에 확산된다.
인쇄술의 보급과 새로운 변화
1500년에 이르면 이미 로마, 파리 등 유럽의 200개 가까운 도시들에 인쇄소가 자리를 잡았으며, 성경과 교리문답서 등 종교서적은 물론 그리스, 로마 고전 같은 책들도 8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어 유통된다. 인쇄기는 많은 사람이 책이나 유인물을 손쉽게 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대중적인 지식의 공유와 소통을 통해 학문의 영향력을 급속하게 확대하였으며, 당시 일기 시작한 르네상스 운동을 가속화시켰다. 귀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책을 소장하게 되었으며, 다양한 독서는 대중의 의식을 일깨워 결과적으로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가져온다. 인쇄술은 같은 정보를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여론 형성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는데 신문은 인쇄술의 직접적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인쇄술의 영향은 종교개혁에서 절정에 달한다. 1517년 로마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고자 면죄부를 판매하자 마르틴 루터는 이를 비판하는 ‘95개조 항의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에 내다 붙인다.
루터의 항의문은 인쇄되어 불과 2주 만에 유럽 전역에 퍼짐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 헌금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생각이 공감을 얻으며 독일 전역에서 가톨릭의 압제와 타락에 저항하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인쇄술 덕분이다. 루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522년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출판함으로써 일반 대중들이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독일어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루터는 인쇄술을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선물이라고 극찬했다.
현대 사회를 흔히 정보화 사회라 부르는데 통신기술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오늘날 엄청난 지식의 유통과 상호소통이 가능해졌으며, 정보산업이 일으키는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져온 변화의 물결과 그 파급 효과는 이에 못지않았다. 이후 유럽은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과 농민 반란 등 내분과 각종 전쟁을 겪으면서 암흑 같았던 중세의 막을 걷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맞는다.
위 글은 교회신문 <15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