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철학박사 김석 교수와 함께 떠나는 유럽여행

등록날짜 [ 2009-07-28 15:14:40 ]

평화롭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역사는 피를 나눈 형제간 살인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니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그것이다. 가인은 동생의 제사만 하나님이 받으신 것에 분개하여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후 태연히 범죄를 은닉하다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과 살육 그리고 추악한 범죄로 점철된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어 남을 불쌍히 여기고 무조건 도움을 베풀려는 선한 본성이 있다고 말했지만 서양의 사상가들은 주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많이 고발한다. 서양 중세를 흔히 암흑기로 부르는데 우리는 이 시기에 자행된 온갖 형벌을 보면서 인간 안에 있는 악마적 성향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중세인들이 유독 포악해서라기보다는 법치주의 같은 이성적 기준이 없었고, 미신적 맹목성이 사회를 지배한 데서 상당 부분 비롯된다.
중부 독일의 요새도시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하여 디즈니랜드 성의 모델이 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는 ‘퓌센’까지 약 300Km의 도로를 ‘로만틱가도’라 부른다. 이 길은 중세의 여러 건축물을 보전한 동화 같은 마을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여행객들을 황홀하게 만드는데 그중에서도 중세의 보석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텐부르크’가 특히 유명하다. ‘로텐부르크’는 도시 전체를 둘러싼 오래된 목조 난간의 성벽, 종탑, 돌이 깔린 마찻길이 남아 있는 광장 등 중세도시의 오밀조밀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치 과거로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도시 구석에 ‘범죄박물관’이라고 푯말이 붙은 유서 깊은 14세기 건축물이 있다. 둔탁한 회색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세 때 사용한 온갖 형벌기구, 여러 종류의 문서, 중세 형벌 장면을 재현해 놓은 각종 그림과 미니어처가 있어 오싹한 기분이 든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죄인 호송용 마차에 기대어 사진도 찍고, 사람을 결박하는 착고에 머리와 손발을 들이밀고 서로 보면서 웃기도 하지만 여기 전시된 도구들은 실제 사람을 고문하고 심문하는 데 사용되었던 끔찍한 기구들이다.
죄인을 망신주기 위해 얼굴에 씌우는 철로 된 돼지 마스크, 죄인을 앉혀 심문하는 송곳이 촘촘히 박힌 고문의자, 죄인의 사지를 잡아 늘이면서 고통을 주는 도르래 장치, 사람을 가두어 물속에 넣어 익사시키거나 고통을 주는 새장 모양의 작은 감옥… 여기에 가보면 사람이 가진 지독한 잔인성과,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기계들을 만든 잔혹함에 새삼 소름이 끼친다.
중세시대에는 일단 죄인으로 기소되면 자백을 할 때까지 모진 형벌이 가해졌으며, 재판을 통해 본인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오늘날처럼 증거를 통해 범죄를 입증하거나 억울한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치밀한 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 심판관의 심증이나 이웃의 고발이면 범죄 혐의는 충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세사회를 광기로 물들인 마녀사냥이다.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 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되었으며 심지어 12살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형벌의 목적은 권력의 절대성을 과시하고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공포는 일종의 통치 기제였다. 특히 마녀나 이단으로 단죄되면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화형에 처하거나 심지어는 창으로 몸을 관통당해 꼬치처럼 세워져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었던 중세인들에게 죄인의 처형장면처럼 자극적인 구경거리는 없었다고 한다. 특히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돌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 사회적 불안감이 심해지면 어김없이 대규모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을 통해 사회적 위기를 해소하곤 하였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금과옥조처럼 강조하는 인권, 박애주의, 관용 같은 계몽주의적 개념들은 중세시대를 반성하고 극복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고도로 문명화된 21세기에도 여전히 테러, 고문, 집단학살 등이 자행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악한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악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자.

위 글은 교회신문 <16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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