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루오 作 <성안>(左), <예수 그리스도>(右)
‘색의 연금술사 루오 展’ 3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서
보는 사람이 감동하여 예수 믿게 할 초상화 평생 그려
20세기 전반의 화단을 대표하는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년∼1958년) 앞에는 ‘색의 연금술사’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다.
색의 연금술사 루오는 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예술적 재능을 나타냈음에도 14세 때부터 공예 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업자의 견습공으로 일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스테인드글라스 견습공으로 일한 경험은 후에 루오의 오묘한 색채 발현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 후 <연자매 돌리는 삼손>, <어린 그리스도와 박사들>과 같은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가 정신과 경제, 건강으로 인한 고난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그림의 주제도 창부, 어릿광대, 곡예사, 노동자, 헐벗은 아이들 등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하층민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졌다. 그들의 고통과 가난한 삶을 화폭에 담는 동시에 그들의 위로자로서 자비와 연민에 넘치는 예수의 얼굴을 그들의 그림과 병렬시켰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그림을 통해 구원과 초월의 메시지를 전했다.
루오는 언제나 “보는 사람이 감동하여서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성안>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롯해 예수의 얼굴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많이 그린 것도 루오 자신의 소망을 잘 드러낸 증거다. 따라서 그가 무엇을 그리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영원한 모티브가 되었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80세가 된 조르주 루오에게 그레고리오 대교황 훈장을 수여했다. 이러한 훈장 수여는 루오의 예술 세계에서 짙게 드러나는 종교적 메시지를 인정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들은 루오를 명백히 종교미술 화가로 일컫지는 않는다. 그는 교리나 복음의 내용을 직접적인 주제로 해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메시지를 그 시대의 살아있는 상징들을 통해 드러냈기 때문이다.
루오는 그리스도와 성경 이야기를 주제 삼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루오가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의 죄와 악을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의 충동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여러 얼굴을 통한 상징적 화면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그림 자화상 <견습공>에는 소외된 자들에 관심을 뒀던 그의 인생관이 드러난다. 1925년(54세) 이 작품을 그렸을 당시 그는 슈발리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그 1년 전에는 파리에서 회고전을 크게 열었다.
그는 <견습공>에서 자신을 넓은 이마에 퀭한 눈을 가진 소박한 장인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자리가 소박한 사람들과 서민들 곁 그리고 최하위층 사람들 곁이라는 것을 밝혔다. 하지만 루오는 20세기 화가 중 종교적 색채를 가장 짙게 뿜어낸 작가임은 틀림없다. 루오는 여러 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성안(聖顔)>은 루오의 작품으로서 프랑스 국립미술관에 들어간 최초의 작품이자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인내의 모습이 표현주의의 대가답게 거친 붓 터치와 두터운 질감에도 적색, 황색, 녹색을 주로 사용하며 강한 선으로 표현하여 일종의 엄숙함을 표현하고 있다.
렘브란트 이후 최고의 종교화가로 꼽히며 마티스, 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전반의 화단을 대표하는 루오는 화폭을 통해 일평생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로 그려냈다. 예수를 그린 화가가 많았지만 유독 루오에게 현대인들의 시선이 꽂히는 이유는, 그가 영광의 예수가 아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의 예수를 그림으로써 수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르주 루오 展’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 28일까지 열린다. 4월 4일(주일) 부활절을 앞두고 2월 24일부터 시작된 사순절 기간에 전시되는 루오 展을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 따뜻하고 가슴 떨리는 감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8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