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산책] 음으로 쓰는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

등록날짜 [ 2010-05-03 13:12:37 ]

교향곡 6번‘비창’ 통해 본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생애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사진, 1840~1893)의 작품들은 그의 이름과 작품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멜로디 한두 소절만 들어도 ‘아하, 이 음악’ 할 만큼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친숙한 음악으로는 발레곡 백조의 호수의 여러 음악, 역시 발레음악인 호두까기 인형, 바이올린 협주곡, 호른(금관악기 중 하나임)의 장엄한 테마로 시작하는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그의 교향곡 5번의 멜로디도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을 법한 음악이다.

그에게는 6개의 교향곡이 있다. 이 곡들에는 특별한 부제가 없고 6번만이 비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도 작곡가가 후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비창은 영어로 Pathetic 즉, ‘측은한, 불쌍한, 가슴 아픈’ 이라는 뜻이다. 왜 차이콥스키는 이 곡에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격한 감정 느낄 수 있는 리듬
이 곡은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저음 현악기인 콘트라베이스의 공허한 5도 화음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첫 멜로디는 최저음 목관악기인 바순의 솔로다. 차이콥스키는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이 빠져나가려 해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슬프고도 괴로운 상황을 이렇게 오케스트라의 최저음 악기들로 표현했다. 그 선율을 비올라(중저음의 현악기)가 받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탄식뿐.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채 비올라는 5도 화음으로 서주부의 끝을 맺는다.

음악은 알레그로(Allegro, 조금 빠르게)로 바뀌어 뭔가 활력과 생동감을 소유하려 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결국 더 큰 좌절과 한탄, 분노로 바뀔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오케스트라 전체가 빠른 리듬의 페세지(형태)로 앙상블 연주를 하기도 하고 현악기의 격렬한 스타카토(   한 음씩 또렷하게 끊는 듯이 연주함)로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플루트의 밝고 명랑한 소리가 잠시 분을 달래기도 하며 트럼펫의 신경질적인 소리도 가끔 들린다.

이런 격한 감정이 최고조에 달할 때 오케스트라 전체가 서로 경쟁하듯 빠른 16분 음표로 연주하다가 지쳐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서인지 조금씩 사그라질 때면 첼로의 저음부로 숨을 고르는 듯 삼연음표의 리듬으로 점점 천천히 바뀌어 간다.

이윽고 들려오는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슬픈 바이올린의 선율이 천천히 연주되는데 이것은 왠지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그리워하는 듯한 아쉬움의 탄식 소리인 듯하다. 이것은 다시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악기(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의 합주로 이어진다. 현실을 잊은 듯한 현악기의 경쾌한 반주 형태가 특이하다. 클라리넷의 극도의 피아니시모(아주 작게)로 이 잠깐의 행복했던 옛 추억이 꿈결같이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오케스트라의 포르티시모(아주 크게) 연주가 괴롭고 힘든 현실의 문제로 다시 돌아옴을 묘사하고 있다. 다시 부딪힌 삶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그를 더 무겁고 더 힘겹게 짓밟는다.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삶은 극도의 불안과 분노에 가득 차 보인다.

음악은 불규칙적이고 시끄러운 듯한 소리로 가득하다. 트롬본과 튜바(저음 금관악기)의 짓누르는 듯한 무겁고 어두운 소리, 팀파니(타악기)의 귀를 찢는 듯한 격렬한 연타, 현악기들의 쉴 새 없이 빠른 움직임, 배신감과 치욕에 젖어 날뛰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러나 불안과 분노도 좌절과 절망이 오기 전에 가질 수 있었던 사치품인 것을! 팀파니와 콘트라베이스의 트레몰로(음을 떨듯이 연주하는 주법), 절규하는 듯한 바이올린의 외침, 트롬본의 흐느끼는 대선율, 목관악기의 저 소리는 분명 쏟아지는 눈물이리라.

절망의 절정 후,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으로 다시 나오는 아름다운 그 멜로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듯 현악기가 피치카토(줄을 튕겨서 연주하는 주법)로 하행하는 스케일을 연주하면 트럼펫이 삼중주로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듯이 울려 퍼진다.

이상은 비창 교향곡 1악장에 나타난 음악적 표현들을 나의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써본 것이다. 작곡가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을 보면 실제로 말년의 차이콥스키는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도 바랐던 음악가로서의 성공적인 삶도 그의 삶을 행복하게 하진 못했던 것이다. 절망과 좌절, 무관심, 고독, 두려움, 고통에 대한 그 모든 해답은 오직 ‘예수’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을까?

위 글은 교회신문 <19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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