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7-13 08:17:51 ]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복잡성
일률적 화음 깨트리며 인생의 괴로움 표현해
한 음악에 대해 깊이 알면, 그 곡을 만든 사람의 깊은 내면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 본 적도 없고, 그와 같은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100여 년 전에 쓰인 그 음악을 통해 나는 작곡가의 심정과 그 시대 풍속과 사상을 느낀다.
인생에서 수많은 문제로 그가 얼마나 고민하고 괴로워했는지, 또는 기뻐하고 즐거워했는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또 그와 똑같이 승리감에 도취하기도 하고 좌절의 나락에 한없이 빠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로 그런 느낌을 받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그것이 나의 주관적인 해석일지라도 나 스스로 그러한 해석과 느낌에 대해 확신한다. 그럴 때면 어느새 그 음악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가 만든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서곡도 내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음악이다. 악극은 바그너가 창시한 음악 장르인데, 말 그대로 뮤직(악) 드라마(극)로, 가수가 극에 맞는 분장과 의상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와 연기를 하는 것이 오페라와 똑같아 오페라의 한 장르라고도 한다.
조금 다른 점은 음악의 역할이 오페라처럼 부수적으로 극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악극에서는 인물의 감정이나 심리묘사, 극의 대립과 갈등, 갈등 고조, 장면 전환 등 여러 가지 극적(드라마틱)인 요소들이 노래와 오케스트라 반주 그리고 음악 안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고 표현한다.
서곡(序曲)은 오페라나 발레 같은 무대 음악에서 극을 시작할 때 처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곡으로, 원어 ‘Overture’에는 ‘문을 연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예전에 오페라 공연을 할 때 오페라 공연장 문을 연 데에 기인한다고도 한다. 오페라에 따라서 오페라 전체를 연주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서곡만을 따로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연주하기도 하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도 자주 연주되고 사랑받는 바그너의 서곡 중 하나다.
바그너 작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세 유럽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중세 독일 시인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크가 쓴 서사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바탕으로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쓰고 작곡한 그의 대표작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남자, 자기 약혼자를 죽인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며,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극 내용만큼이나 그 음악도 그러하다.
그 예로 해결하지 않은 화음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컨대, 우리가 보통 접하는 음악은 화음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항상 긴장과 완화라는 흐름 속에서 화음을 해결한다. 간단한 예로, ‘도-미-솔’ 로 시작한 화음은 ‘파-라-도’, ‘솔-시-레’를 거쳐 다시 ‘도-미-솔’로 마무리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적어도 바그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나 이러한 일률적인 화음 변화로는 바그너가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 그가 겪은 인생에서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 처음에는 작은 문제가 점점 커져서 결국 자기 삶을 짓밟는 지경까지 이르는 그런 복잡 다양한 것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는 ‘그래야만 한다’는 규범을 벗어버린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이른바 ‘무한선율’이라고 일컫는 바그너의 끊임없는 선율의 연속이 등장한다. 처음 시작하는 첼로의 우수에 찬 선율과 그것을 받는 목관의 애매한 답변, 거기에는 아무런 연관도 아무런 해결도 없다. 그저 다음 문제를 던질 뿐이다. 비슷하지만 조금 더 커진, 조금 더 고조된 문제. 목관이 다시 답하지만 그것은 이미 거기에 그 다음 문제가 내포돼 있다. 이런 식이다. 분명히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지만 그것이 어디까지인지 모호하다.
그렇게 희미하게 시작한 그 음악이지만 어느 순간엔 그 희미하고 가냘픈 음악이 얽히고설켜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그것은 어느덧 욕망이 되고 갈증이 되어 무겁게 짓누르는 듯하다. 도대체 그의 인생을 그렇게 괴롭힌 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을까? 벗어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 예술창작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 이 모든 것보다 더한 것은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경건하도, 진실하려 해도, 깨끗해지려 해도 다시금 발목을 붙잡는 죄의 문제, 그것에 대해 몸부림치며 외치는 그의 내면의 소리가 바로 그의 음악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아니었을까.
위 글은 교회신문 <20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