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신(新) 해석

등록날짜 [ 2010-10-26 08:40:29 ]

기존 교향곡과는 다른 파격적인 표현 많아
신앙에 접목해 들어도 깨달아지는 점 있어

요즘 나는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의 환상교향곡에 심취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가 겸임교수로 있는 서경대학교 음악학부에서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밤과 낮으로 오가며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은 전문 오케스트라도 꺼릴 정도로 기교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난해한 곡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제목과도 같이 이 곡은 작곡가의 환상에 의한 음악적 표현이 많기에 때로는 상식을 벗어난 연주법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주자들은 보통 활의 털이 있는 부분을 현 부분에 그어서 마찰을 일으켜 좋은 소리를 얻는 연주를 한다. 그런데 이 곡 어느 한 부분에 가서는 일시적으로 악기 활을 뒤집어서 활 나무 부분을 이용하여 활을 두드리듯 연주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을 꼴 레뇨(Col legno)라 하는데 그 뜻은 ‘나무를 이용하여’라는 뜻이다. 

베토벤 영향으로 작곡가의 길로
베를리오즈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보다 조금 늦게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원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학도가 되려고 준비하던 베를리오즈를 음악의 길로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베토벤의 교향곡이었다.

베토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당시 파리에서 개회했던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에 매료되어 자신도 그와 같은 곡을 쓰고자 음악가의 길로 선회하였다. 

교향곡 9개를 쓴 베토벤에 비해 그에게는 교향곡다운 곡은 이 환상교향곡밖에 없다. 게다가 이 곡도 전통적인 교향곡 양식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그런 연주 상의 기괴한 표현뿐만 아니라 우선 보통 교향곡이 4악장인데 비해 이 곡은 전체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악장마다 작곡가에 의한 상황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1악장은 꿈, 정열(Reveries, Passions)인데 이것은 실의에 빠진 한 젊은 작가가 운명적인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꿈과 정열을 가지게 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플루트의 나른한 3연음으로 시작하여 현악기가 약음기(소리를 작게 만드는 장치 일종)를 사용하여 꿈꾸는 듯한 멜로디를 이어가며 다시 뒷부분에 들어가서는 금관과 팀파니의 격렬한 연주로 정열을 표현한다.

이어 2악장은 무도회(Un Bal), 3악장은 들녘 풍경(Scene aux champs), 4악장은 단두대로 행진(Marche au supplice), 5악장은 마녀들의 밤의 향연(Songe dune nuit du sabbat)으로 이어진다.

5악장을 위해서는 아주 큰 규모의 관현악이 요구되는데 나는 이 곡의 첫 부분을 연주할 때마다 이것은 마치 지옥을 묘사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무슨 음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비벼대는 바이올린의 소름 끼치는 트레몰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부글부글 유황이 타오르는 듯한 반음계 스케일 그리고 이어지는 금관악기의 절망에 찬 하행하는 선율, 극도로 높은음으로 연주하는 오보에 소리는 ‘제발 나 좀 이곳에서 꺼내줘!’라고 외치는 절규처럼 들린다.

마지막 때를 알리는 듯한 종소리. 이것은 타악기 주자에 의해 연주되는데 베를리오즈는 교회 종과 같은 거대한 종으로 연주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요즘 연주회에서는 연주회용 종을 사용한다.

두 대의 튜바-금관악기 중 가장 저음이 나는 악기-에 의해 연주되는 테마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심판의 날(Dies irae)의 엄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어지는 트럼펫과 트롬본을 비롯한 금관악기의 대선율은 마지막 날 울려 퍼질 나팔소리일 것이다.

곡의 끝 부분은 청천벽력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로 가득 차다가 갑작스럽게 폭발하듯 끝나는 것이 꼭 주님 재림의‘그날’이 갑자기 임함과 같고, 심벌즈의 강렬한 울림은 동에서 서까지 번쩍임과 같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5악장을 나만의 감동으로 표현해 보았다. 이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많이 벗어난 나 개인적인 해석이다. 그가 신앙생활을 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알았든 몰랐든 그의 영혼은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 의도됐든 그렇지 않았든 그 구원의 갈망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음악을 통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위 글은 교회신문 <21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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