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8-30 19:28:32 ]
‘오펜바흐’ 일생일대 대작(大作) 오페라
순간의 쾌락 위해 영혼 잃은 괴로움 표현
누구나 인생에서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작품을 한번쯤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에게는 그런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크다. 비록 지금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알지 못하는 후세 청중들을 향해 심혈을 기울인 작품, 그것이 단 한 곡이라 할지언정 작곡가는 그런 명작을 만들고자 일생을 쏟을 것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평생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는 일생을 오페레타(희가극, 경가극으로 번역하는 가볍고 오락적인 오페라, 후에 미국에 건너가서 뮤지컬로 발전했다) 같은 가벼운 작품을 써가며 대중에게 사랑받은 현실 제일주의 작곡가였다. 그저 현재 보이는 청중의 반응에 민감하고 인기와 흥행에 초점을 맞춘, 그래서 음악적, 예술적 깊이보다는 자극적 효과에 더 주력한 작품들로 그의 작곡 인생을 수놓았다.
그런 오펜바흐에게도 일생일대의 정통 오페라를 만들고자 의욕적으로 시작한 작품이 그의 유일한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다.
필자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2011년 대학 오페라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경희대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과 함께 이 작품을 올리고자 요즘 한창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작품을 대할수록 작곡가의 이러한 열정과 노력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 오페라는,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문호 E.T.A 호프만(1776~1822, 그림과 음악에 뛰어났고 대법원 판사를 지낸 후 소설을 썼다)이 회상하는 초현실적인 러브 스토리 세 편으로 구성된다(사실 이 오페라는 E.T.A 호프만의 단편소설 세 가지를 기초로 쓴 것이다). 오페라 시작과 끝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삽입해 극의 내용을 보충한다.
극이 시작하면 가극장 옆 주점에서 호프만이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실패한 세 가지 연애담을 전한다. 그 사랑의 대상이 인상적인데, 1막에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은 기계 인형 올랭피아다. 마술 안경을 쓴 호프만은 올랭피아를 진짜 사람으로 착각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영혼이 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의 결말은 결국 좌절과 실망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조롱으로 끝난다.
2막에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은 음악가의 딸이며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안토니아다. 그녀는 호프만이 좋아하는 노래를 계속 부르려 하나 폐병을 앓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노래하는 것을 금지당한다. 왜냐하면, 그의 모친도 그와 똑같은 병으로 노래를 부르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녀의 죽음이 의사 미라클의 약 때문이라 믿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의사 미라클은 다시 안토니아를 치료하러 오고 약을 먹은 안토니아는 죽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내어 노래를 부르다 결국 죽고 만다.
3막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뱃노래(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삽입되어 유명해진 노래)로 시작한다. 호프만이 베니스의 줄리엣(줄리에타)과 나눈 사랑 이야기로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나 퇴폐적이고 세상적인 속물근성으로 물든 베네치아의 고급 창녀인 줄리엣은 마법의 심부름꾼인 다페르트트와 짜고 호프만을 유혹하여 호프만의 거울속의 형상(그의 영혼을 뜻함)을 훔친다. 순간의 유흥과 쾌락에 빠져 여자에게 모든 것을 내준 호프만은 결국 자신이 속아 영혼까지 빼앗긴 것을 알고 괴로워한다.
이러한 내용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설명하는 듯 표현하는 것이 이 오페라의 특징이다.
작곡가 오펜바흐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과 음악성을 나타내려는 듯 보인다. 특히 2막에서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지하고 깊이 있는 음악과 상황에 맞는 표현력과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공연이 되는 작품이 이것뿐인 것은 아마도 그런 그의 진심어린 노력이 지금까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설명> 오는 8월 22일부터 시작하는 2011년 대학오페라페스티벌에서 9월 7일(수)부터 9일(금)까지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공연할 ‘호프만의 이야기’.
위 글은 교회신문 <2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