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함께하는 아름다움의 하모니

등록날짜 [ 2012-05-01 13:18:53 ]

‘함께’는 보잘것없는 것을 아름답게도 하고
홀로 하는 화려함보다 더한 감동을 주기도

학창 시절 누가 옆자리 앉는 짝꿍이 되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던 기억을 되새겨 본다. 비교적 우등생이던 나는,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짝이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짝이 됐다. 매일 옆에 앉아서 한나절을 함께 지내다 보니 그 친구의 좋은 점을 나도 모르게 닮게 되어 참 묘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 이후로 나에게는 은연중에,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잘하는 사람 옆에 앉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대학교에 진학하여 합창 수업을 들을 때였다. 합창 연습을 한 후 학기 말이나 연말에 연주하는 교과목인데 성악과, 피아노과, 작곡과 학생들이 함께했다. 주로 소프라노는 성악과 학생들이, 알토는 피아노나 작곡과 학생들이 맡았는데, 한번은 성악과 학생 한 명이 알토에 자원했다. 그래서 1년간 그 학생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노래했더니 내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음악 활동 중에 여럿이 함께하는 합창, 중창, 합주를 많이 접한다. 함께하는 음악은 혼자 하는 음악과 매우 다르다. 합창 단원이나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집하는 오디션의 경우, 그 평가 기준은 성악이나 악기 콩쿠르와는 다르다. 솔리스트는 ‘혼자’, 합창이나 합주는 ‘함께’ 연주한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치는 솔리스트의 삶을 꿈꾸며 음악 생도들은 지금도 연습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정작 솔리스트로 불릴 만한 연주자는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소위 솔리스트도 함께 연주하는 합주나 합창을 하기도 한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은 어떠한 태도를 원할까? 현란한 테크닉보다는 정확함, 정열적인 연주보다는 담백함, 완벽하게 연습한 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기보다는 다소 숙련이 덜 되었더라도 연주하면서 겪는 사고(事故)에 대처할 순발력을 더 높이 살 것이다.

주일마다 멋진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우리 교회 성가대는 어떠한가? 삼겹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런저런 음색이 어우러져 한마음으로 찬양하는 그 소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함께’하는 위력은 이렇듯 대단하다. ‘함께’는 닮게 하고, ‘함께’는 보잘것없는 것을 아름답게 하고, ‘함께’는 초라하더라도 화려함보다 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함께하는 사회’라는 말이 있다. 구성원을 원하는 대상으로 선택하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자연적으로 어떠한 사회에 소속하기도 한다. 각자 지위와 역할에 걸맞게,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며 함께 살아간다.

만약 내가 예수님과 친구로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는다면 내 삶은 얼마나 풍요로울까?

‘함께하는 것’의 선택은 자유다. 예수와 함께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교회에서 성도와 함께 예배할 것인가, 혼자서 예배할 것인가. 성가대석에서 함께 찬양할 것인가, 일반석에 앉아 지켜볼 것인가. 충성의 자리, 기도의 자리, 전도의 자리에 함께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천국까지 함께 갈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본받아 닮아가며, 도우심을 구하고, 그 응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답다.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모니, 진정한 영혼의 하모니로 천국에서 찬양하기 위해 오늘도 ‘함께’를 꿈꾼다.

위 글은 교회신문 <28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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