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찬송가 탄생 비화 10] 네 자녀를 잃은 슬픔을 승화한 곡

등록날짜 [ 2013-02-13 10:26:24 ]

스패포드(H.G. Spafford) 작사, 블리스(P.P. Bliss) 작곡

<사진설명> 스패포드.

변호사인  호레이셔 게이츠 스패포드(Horatio Gates Spafford, 1828~1888)는 영국인이지만 미국 땅에 와서 성공한 몇 안 되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또 찬송가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무디 전도단’의 재정 후원자로도 잘 알려졌다. 무디 목사와 스패포드는 9세 차이에도 친구며 신앙 동지로서 늘 서로 힘과 용기를 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스패포드는 사업이 번창한 만큼, 하나님의 사업에 후원을 더 많이 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1873년 어느 날, 스패포드의 공장에 설치된 유류 탱크에서 유류 누수로 큰불이 났고, 스패포드는 사업장에서 무엇 하나 건질 것이 없을 정도로 온통 검은 재로 타버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도 하나님 사업에 누구보다 열정을 지니고 살던 스패포드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삶에 긍정적이던 스패포드는 포기도, 실망도 하지 않았다. 오직 스패포드는 현실로 닥친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피해를 최소로 보게끔 사고 뒷마무리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런대로 사고가 정리된 후, 스패포드는 자신의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온몸을 던질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내와 자녀 넷을 일단 자신의 고향인 영국으로 보낸 뒤 자신은 홀로 남아 다시 사업에 매진하여 제자리를 찾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후 “사업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인사를 나누고 아내와 자녀를 모두 배에 태워 영국으로 보냈다.

선박 충돌 사건 소식을 접하다
얼마 후, 스패포드는 에든버러에서 전도단 책임자인 무디 목사와 함께 미팅하고 있었는데, 그 미팅 중에 아주 놀랍고도 슬픈 소식을 접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협의회 대원을 싣고 미국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던 ‘빌르 드 아부르’라는 증기선이 대서양 한복판에서 대형 여객선과 충돌하여 불과 1시간여 만에 침몰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 스패포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배에 자신의 아내와 네 자녀가 승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규모 충돌로 증기선은 가라앉기 시작했고, 갑판에 있던 부인은 침몰 순간에도 난간에 매달려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착한 네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꼭 살려 주십시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죽음의 두려움 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힘을 주십시오.”

기울어져 침몰하는 배에서 네 자녀와 아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모두 바닷속에 빠졌고, 그 배 역시 완전히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아내는 이 참사로 표류하다가 다행히 구조되었고,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고로 226명이 죽고 스패포드의 아내를 포함한 47명만이 겨우 구조되었다.

사고 소식을 접한 스패포드는 세상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실감과 함께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여! 저는 사업이 무너진 것도 감당키 어려운 상황인데, 어찌하여 제게 사람으로서 이겨낼 수 없는 이런 일을 주십니까? 저는 이제 무슨 힘으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까? 저는 이제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여! 제가 연단되어야 할 일이라면 저에게 찾아오셔서 평안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던 그에게 주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구절과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구절이 매우 선명하게 그의 마음에 새겨졌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폭풍 같은 슬픔이 지나고 서서히 뜨거운 평강이 차오르고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혼에게 부어 주시는 주님의 깊은 평안이었다.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을 표현하고 싶어서 무릎을 꿇고 하던 기도를 마치고 침실에 있는 작은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수첩에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라는 제목으로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 그 자리에서 찬송시를 써 내려갔다.

스패포드는 시카고로 돌아와서 이 시를 다시 한 번 정리했고, 무디 목사와 그의 전도단 멤버의 위로 속에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던 중 ‘무디 전도단’의 찬양 인도자며 찬송 작곡의 대가인 필립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가 참사로 안타깝게 자녀를 잃은 스패포드를 위로하며 작곡해 주었다.

스패포드는 여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갈망하며 살았다. 1871년에 일어난 시카고 대형화재 참사 때도 생존자들을 도우려고 두 부부는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그들은 생존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전혀 갱생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들이 희망을 품고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데 크게 헌신하였다. 스패포드는 그러한 일들을 하던 중 계획을 또 하나 세웠는데, 그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빈민을 구제하며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의 가족은 1881년, 예루살렘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스패포드 부인과 증기선 침몰 사건 이후 새로 태어난 두 딸이 신앙생활을 착실히 할 뿐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위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활동했다.

스패포드는 예루살렘에 구제구호 단체인 ‘아메리칸 콜로니’를 설립했다. 이 단체의 선한 활동들이 빛을 발하여 후에 스패포드는 노벨상을 받았다. 

위 글은 교회신문 <32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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