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찬송가 탄생 비화 22] 절망 속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 말씀

등록날짜 [ 2013-05-14 15:39:30 ]

장수철 작곡 / 최봉춘 작사

한국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인 장수철 박사(1917~1966)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살았던 인물로, 그의 삶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장수철 박사는 평양에서 장로의 손자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중앙신학교를 마쳤고, 일본에서 동경고등음악학교 작곡과, 미국 무디성서학교 종교음악과, 시카고 아메리칸음악학교를 마치고, 킹즈대학에서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때로는 목회자로, 때로는 지휘자로, 때로는 선생으로 많은 일을 맡아했다.
장수철 박사.

피난길에서도 사랑한 하나님 말씀

민족 역사상 가장 비극이라 할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온 나라가 두려움과 공포로 혼란에 빠졌다. 수많은 사람이 황급히 수도 서울을 떠났을 때,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끊어진 한강 다리 앞에서 발을 구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중에 장수철 박사 가족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울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울부짖음으로 뒤범벅된 한강 변.

누구도 자신의 앞길을 알 수 없는 전쟁의 비참함이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골짜기 앞에서 장수철 박사와 부인 최봉춘 여사의 입에서는 초연하게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시편 23편 말씀이 흘러나왔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되뇌고 있을 때, 기적처럼 멀리서 조각배 한 척이 흘러 내려와서 장 박사 가족은 피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이 부부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이다.

유학 도중에 받은 아내의 편지
전쟁이 끝난 후, 장수철 박사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가난한 환경 탓에 피아노는 물론 악기 하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 화음을 떠올려 작곡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유학생활 중에는 공부 외에도 돈을 벌려고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고된 생활이 이어졌으나, 사랑하는 가족과 주님을 의지하며 참고 견뎌냈다.

1955년,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 살던 장수철 박사에게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서 갑작스럽게 전갈이 왔다. 열두 살 난 큰딸 혜경이가 심한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아내 최봉춘 여사는 편지 끝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시편 23편 구절을 적어 놓았다. 자식을 잃었을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최봉춘 여사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말씀이었다.

장수철 박사 부부는 떨어져 힘든 날들을 보냈지만, 시편 23편 말씀을 붙들고 절망과 슬픔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렇듯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장수철 박사 부부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 아름답고 온전한 믿음으로 보였을 것이다. 장수철 박사는 가정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닥칠 때마다 지켜 주신 시편 23편 말씀을 토대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고아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다
한국에 돌아온 장수철 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대학로에 있는 종로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세계월드비전 총재였던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는 장수철 박사에게 고아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자고 권면했고, 아이들을 사랑한 장수철 박사는 주저할 것도 없이 일을 진행하였다.

장수철 박사가 고아 32명을 모아 만든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은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은 전쟁고아와 미망인을 돕고자 한경직 목사와 밥 피어스 선교사가 창립한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을 통해 1960년 8월에 세워졌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은 세계 곳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을 일으켜 전 세계에 한국인의 정신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월드비전 한국 50년 운동사’ 기록을 보면, 카네기 홀 공연 당시 입장한 3500명 외에 입장하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린 청중이 5000명이었다. 미니애폴리스 공연에서는 4000명이 입장하지 못하고 되돌아갔고, 워싱턴에서는 입장객 8000명 외에 2000명이 입장하지 못하였으며,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에서는 정석 1만 2000석이 가득 차고 5000명이 입장을 못하였을 정도였다.

한국 음악사 중에서 이토록 많은 청중을, 더군다나 외국에서 이끈 기록은 없었다. 이들은 총 14개국 104개 도시에서 4만 마일을 여행하며 약 50만 명에게 약 400곡을 연주했다.

소중한 딸을 잃어버린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장수철 박사는 누구보다도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유년부 찬양곡집 『탄일종』을 비롯해 150여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어린이 찬송가 보급에도 앞장섰다.

마지막까지 새문안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던 장수철 박사는 1966년 11월 8일, 과로로 간경화증이 악화해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장수철 박사가 지은 찬송곡은 전 세계에서 울려 퍼지며 감동을 주고 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1절)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2절)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에
        사랑하는 나의 목자 음성이 나를 언제나 불러주신다

(3절) 못된 짐승 나를 해치 못하고 거친 비바람 상치 못하리
        나의 주님 강한 손을 펼치사 나를 주야로 지켜주신다
 
(후렴)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위 글은 교회신문 <337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