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6-26 09:59:30 ]
프란시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 Havergal) 작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 A. Mozart) 작곡
<사진설명> 프란시스 리들리 하버갈.
이 찬송을 작사한 프란시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찬송 작사가다. 프란시스는 1836년 11월 14일 영국 잉글랜드 우스터 애슬리에서 국교회 교구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헨리 하버갈은 목회자이자 작곡자로서 찬송가를 보급하는 활동을 했고,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서인지 어릴 적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또 4세 때 성경을 읽고 썼고, 7세부터 시를 썼다. 특히 언어적 소양이 뛰어나서 독일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에도 매우 능했다. 이렇듯 다방면에 천재성이 있어서 프란시스를 찾는 곳이 많았지만 “주님을 위해 글을 쓰고, 찬송가를 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내 사명이다”라고 마음을 정했다.
하나님을 만나다
프란시스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지는 못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대신 죽어 주신 사랑은 위대하지만 그 사랑이 온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읽었다.
14세 때 프란시스는 쿡(Cooke) 여사와 영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쿡 여사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약속으로 너를 부르셨단다. 네가 믿고 그분께 너를 드리기만 하면 된단다”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란시스는 감격에 젖어 모든 의심을 떨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를 내 구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프란시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땅과 하늘이 밝게 보였다. 드디어 내 주님을 믿고 만났다. 마침내 내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길 수 있었다”라고 처음 주님을 만난 순간을 간증했다.
작품 활동이 곧 기도하는 것
14세에 예수를 영접한 후부터, 42세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프란시스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다. 수많은 찬송가 가사를 쓰고, 복음을 전하려고 편지를 쓰고, 전도지를 썼다. 병약한 체질 탓에 항상 몸이 약하고 건강하지 못했지만 단 한순간도 글쓰기와 작곡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불평불만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모두 드렸으니, 그분이 다 책임지시리라 생각했다.
이런 프란시스를 두고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프란시스에게 글쓰기란 기도와 마찬가지였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작곡하였다. 언제나 시간을 내어 성경 말씀을 읽었고,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프란시스가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한 원동력은 바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은 어린아이가 한 줄 받아쓰고는 다음은 무엇을 쓸까 기다리는 행동과 같습니다. 내 생각과 힘으로는 결코 쓸 수 없는데 주님이 생각을 주시고, 한 줄씩 속삭여 주십니다.”
영적 체험으로 탄생한 찬송
프란시스가 1874년 2월 4일 영국 귀족 아렐리 가문에 초대되었을 때 일이다. 프란시스는 그곳에 5일간 머물었는데, 아렐리 가정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믿더라도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사가 없었다. 프란시스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 제목이 있었다. 바로 ‘이 집안 모든 사람을 다 내게 허락해 주셔서 나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님을 아는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10명가량 되는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하였다. 프란시스의 기도로 한 가정이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프란시스는 하나님 은혜에 기뻐하며 밤새도록 찬양했다. 자정쯤에 주인댁 두 딸이 프란시스에게 왔는데, 둘 다 구원받은 기쁨이 충만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기도는 확실히 응답된다는 영적 체험을 하였고, 더욱 주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프란시스는 마음에 떠오른 ‘나의 생명 드리니’를 시작으로 시를 써 내려갔다. 이 시에는 프란시스가 주님께 헌신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몸이 허약했으나 생명을 다해 견디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찬송가를 썼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르는 곳에 발걸음을 아끼지 않았다. 타고난 음악적인 재능은 세상 음악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했고, 물질과 시간을 주님께 감사하며 드렸다.
이 시는 그 해 발간된 『은혜와 영광의 노래집(Songs of Grace and Glory)』에 실렸다. 한동안 여러 곡에 이 시를 붙여서 부르다가, 미국의 유명한 찬송출판사 대표이자 작곡가인 메인(H. P. Main, 1839~1925)이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곡을 찬송가 곡조로 편곡하여 『복음찬송집(Gospel Hymns Complete, 1894)』에 실었고, 여러 나라에 알려졌다.
프란시스가 작사한 다른 찬송으로는 ‘주 날 불러 이르소서’(267장),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375장), ‘주 없이 살 수 없네’(415장), ‘영광스럽도다 참된 평화는’(472장), ‘예수 영광 버리사’(504장),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535장) 등 아홉 장과 작곡한 찬송 ‘즐겁도다 이 날’(157장) 한 편까지 모두 열 편이 우리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34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