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8-13 09:16:17 ]
각각 공산국가와 자유국가에서 활동한 천재적 음악가
생전에 단 한 번 연주장에서 만났지만 서로에게 매료돼
<사진설명> 쇼스타코비치(왼쪽). 번스타인(오른쪽).
필자는 오는 8월 23일(금) 대전 문화의전당 아트홀에서 대전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다. 그래서 요즘 한창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공부하는 데 열심을 내고 있다. 이번에 공부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Shostako vitch, 1906~1975)는 공산체제하에 있던 구소련의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살던 시기는 러시아의 대 격동기였다. 황제 체제가 1917년 3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같은 해에 일어난 11월 혁명으로 최초로 사회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그 후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가 왕성히 팽창하였으며, 이어 스탈린이 통치권을 쥐고 무참히 인민을 탄압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유롭고 연약한 예술가 기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라는 공산체제는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분명 예술가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산 곳이 소련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음악이 공산주의를 찬미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냉전 시대 때는 우리나라에서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공산주의 때문에, 특히 스탈린이 펼친 강력한 통치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증언한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자유로운 감정을 억누른 채 모든 감정을 은유적으로 아이로니컬하게 음악에 나타냈다. 때론 당의 요구에 순종하듯 공산주의를 찬미하는 듯한 곡을 썼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절대 권력에 대한 비꼼과 반항의식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작품을 더 의미 있고 예술성 있게 느껴지게 한다.
한편 쇼스타코비치와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도 정반대 상황에 있었던 음악가가 있다. 바로 미국 작곡자이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다. 미국 태생 유대인인 번스타인은 가장 미국적인 음악가의 표본이라 하겠다.
번스타인은 당시 전통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아직 후발국에 머물던 미국의 자존심을 한껏 올려놓은 스타 음악가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하고 싶은 말은 언론을 통해 신랄하게 떠들어 댔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해 보았다. 예컨대 지휘, 작곡, 방송, 신문 투고, 하버드대 강의, 피아노 연주, 뮤지컬 작곡, 교향곡 작곡 등. 원하는 작업은 무엇이든지 다 해 놨다고 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음악가였다.
또 번스타인은 매스컴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지휘와 피아노 연주 그리고 사회까지 한 ‘청소년 음악회’는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되어 클래식음악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또 그렇게 해설해가며 하는 음악회는 요즘 우리나라와 세계 여러 곳에서 유행하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의 원조라고 하겠다.
이렇듯 두 사람, 쇼스타코비치와 번스타인은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활동했다. 하지만 대가는 대가를 알아본다고, 그 둘은 생전에 단 한 번 연주장에서 만난 것이 전부라고 알려졌지만, 음악성과 인간성 그리고 천재성에 서로 매료된 점은 참 재미난 사실이다.
번스타인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무척 좋아해서 자주 연주했다. 1979년 뉴욕필과 함께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이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기로 했다. 그 연주회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급히 금지곡을 해제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또 쇼스타코비치는 번스타인이 소련에 와서 연주한 자신의 교향곡을 직접 듣고 대단히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둘은 어쩌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누구보다도 서로 천재성을 이해하는 가까운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옆에 있다고 친한 사이가 아니라 멀리 있어도 서로 진정으로 이해하고 생각해 주어야 가장 친한 사이가 아닐까.
/윤승업
충남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연세중앙교회 찬양대 상임지휘자
위 글은 교회신문 <34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