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산책] 화가의 주관적 의미 부여 시도

등록날짜 [ 2013-09-03 11:14:43 ]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합한 종합주의 사조 구축해
독창적 화법으로 20세기 미술사에 큰 영향력 끼쳐


<사진설명> 고갱 作 <설교 후 환영>(188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72.2×91㎝).

프랑스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낙원의 세계를 동경한 화가다. 고갱은 본래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던 증권 중개인이었으며 아내와 자녀 5명을 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 유행한 인상파 그림을 수집하고 직접 그리기도 했는데 취미로 시작한 미술활동이 그를 전업 화가로 이끈 것은 30대 중반부터였다.

인상파 그림에 흥미를 느껴 미술을 시작했지만 그의 화풍은 인상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예술적 가치관은 인상파와 같은 사물의 외형적 현상을 화면에 옮겨 놓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과 경험으로 비롯한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화의 기본이 되었던 원근법을 과감하게 무시했고 색채에 음영을 생략하여 단순한 원색을 사용했으며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합한 종합주의를 시도했다.

전위예술에 가까울 만큼 혁신적인 고갱의 화풍은 파리의 젊은 화가들에게서 큰 인기를 얻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 나비파(Nibis)라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지만 대중에게는 그의 작품이 환영받지 못했다. 전업 화가로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과 잦은 불화가 일어났고, 결국 가족과 헤어지는 불행을 겪어야 했으나 예술 활동에 대한 고갱의 뜨거운 집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갱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위해 그가 동경하는 세계를 찾아 여행을 다녔다. 고갱이 찾고자 했던 세계는 서구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과 원주민이 사는 원시적인 곳이어야 했다. 고갱은 남태평양의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타히티 섬이 그가 추구했던 낙원의 세계와 닮아 있음을 발견하고 원시적인 풍경과 야생적 자연에 깊이 매료되어 그곳에 정착했다. 고갱은 그곳 풍경을 잃어버린 낙원의 세계로 표현했으며 열정을 다해 작품활동을 이어 갔다.

고갱의 작품 <설교 후 환영>은 고갱이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체류하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설교 후 기도하던 중에 얍복강가에서 야곱과 천사가 씨름하고 있는 환영을 보는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은 기존에 고갱이 그리던 화풍과는 달리 종합주의 양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이다.

그가 추구한 종합주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형에 충실했던 인상주의가 지적 판단과 사고를 무시하는 한계를 자각하고 작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사물의 형태와 색채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빛에 반응하는 사물의 색채 변화와 색의 단편을 그리는 인상파 그림이 오히려 사물을 해체한다고 판단하여 평면적 색채로 단순화시키고 명확한 윤곽선으로 둘러싼 면으로 종합시켰다. 사물의 느낌과 개념을 단순한 색면과 선으로 표현하여 명암이나 입체감이 없는 이차원적 형식을 추구했다.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혼합하여 비물질적 내면의 세계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상징주의 회화의 전형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설명> 고갱 作 <황색 그리스도>(1889년, 버팔로 올브라이트녹스 아트갤러리 소장, 92.1×73.3㎝).

<황색 그리스도>라는 작품 역시 브르타뉴 지방의 풍경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등장시켜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공존하는 상징적 세계를 표현했다.

화면 전체에 노란색과 주황색, 녹색 등 단순한 순색을 사용하여 음영이 없는 선명한 색채와 가느다란 윤곽선으로 대상을 구분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기도하는 3명의 브르타뉴 지방 여인들은 예수를 따랐던 마리아와 여인들을 상징하고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힘없이 눈을 감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당하시는 예수를 나타내기보다 가난하고 고독한 화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고갱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갱은 내용과 주제를 사실대로 전달하는 회화의 전통적 법칙에서 벗어나 화가의 내면의 감정과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그림을 추구했다.

고갱은 무명의 화가로서 가난과 고뇌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지만 종합주의를 선도한 그의 독창적인 화법이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파, 추상주의와 같은 20세기 새로운 미술사조가 탄생하도록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문준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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