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3-24 15:36:39 ]
음악인으로서 사명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고민하다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임을 깨닫고는 큰 소망 생겨
어느덧 독일에 온 지 19년이 지났다. 벌써 독일에서 지낸 연수가 한국에서보다 오래됐다. 한국인이지만 가끔 독일어를 한국어보다 편하게 생각할 정도다. 그동안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무엇을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어린 나이에 떠나 왔나?’
처음 십여 년간은 ‘학업을 위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려 참 열심히도 살았다. 그 결과,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그다음 이유는 학업의 연장선인 ‘직장생활을 위해서’였다.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아직도 내 전공 악기인 플루트를 연주하는 순간이 무척 즐겁다. 특히 오케스트라 수석 자리에 앉으면 물 만난 물고기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단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직업’이라 여겨지면서 회의감이 밀려왔다.
‘다른 공부를 이만큼 노력했다면 더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방황하던 내게 하나님께서 살며시 말씀해 주셨다.
‘네가 음악 하는 이유는 나를 찬양하기 위함이다.’
그 순간 내 삶의 목표가 뚜렷해졌다. 내가 가진 달란트로 많은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찬양하는 것.
지난해 흰돌산수양관 하계성회 때 윤석전 담임목사님 설교 말씀을 듣고 더 확실히 알게 됐다. 그때, 지금 나 된 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이루어 갈 소망이 생겼다. 재림의 소망을 지니고 음악인으로서 사명을 이루어 가는 것.
나는 한국에서는 연세중앙교회 교인이지만 지금 독일에서는 ‘루터교회’ 교인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난 교회다. 그동안 여기저기 독일 교회에 가 봤지만 이 교회에 와서 설교 말씀에 유일하게 은혜 받았다.
요즘 유럽은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이란 등지에서 오는 피난민으로 혼란스럽다. 유럽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독일이 현재 가장 많은 피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유일한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피난민이 첫발을 디디는 곳이다. 집에서 불과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독일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 수용소가 있다.
지금 다니는 교회에 처음으로 악기 연주하러 갔을 때 뉴스로 접하던 피난민들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여자 목사님 한 분이 컨테이너 수용소로 매일 찾아가 전도한 사람들이었다. 모슬렘이었다가 전도받은 사람도 있고, 이란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온 망명인도 있었다. 그중 한 이란인이 내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한국어로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물었다. 뜬금없는 한국어에 무척 놀란 나머지 이란인보다 한국말을 버벅거렸다. 이어진 그의 질문에 정신이 멍해졌다.
“한국에서 어느 교회 다녔어요? 저는 연세중앙교회 다녔는데….”
한국 염색공장에서 4년간 일했다는 그는 동료에게 전도받아 연세중앙교회에 가게 됐고, 윤석전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예수께서 “누가 내 어미와 형제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또 연주하려고 찾아간 독일 교회에서는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이 실행되고 있는 모습에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그날 예배순서에는 모슬렘이었다가 이 교회 교인이 된 세 분을 위한 특별한 행사도 있었다.
이곳 독일에서 나는 가끔 연세중앙교회와 독일 지역 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윤석전 담임목사님께서 아이티, 브라질, 미얀마 등 각 나라에서처럼 독일에서도 성회를 열어 하나님 말씀을 전해 주셔서 이 나라에 다시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한다.
한희
플루티스트
독일 뮌헨 국립 음대 Meisterklasse 과정 졸업
카이저슬라우테른 오페라극장 수석
위 글은 교회신문 <42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