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4-29 02:07:50 ]
목소리로, 손으로, 몸으로 하는 찬양의 위대함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선물
베토벤은 선배인 모차르트, 하이든과 달리 오케스트라의 인원과 악기 종류를 훨씬 많고 다양하게 구성했다. 어떻게 보면 악기 마니아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력을 다 잃은 인생 말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인간의 목소리’라고 깨달았다.
목소리로 찬양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작곡한 교향곡 9번은 ‘합창 교향곡’이라 불린다. 관현악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 교향곡에 성악 솔로, 2중창, 4중창, 그리고 합창을 넣은 시도는 파격 그 자체였다. 교향곡에 인간의 목소리가 첨가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당시 대중과 비평가들은 대단히 불만스러워했지만, 베토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목소리가 최상의 소리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관철했다.
‘합창 교향곡’은 주제 모티브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율인 찬송가 13장 ‘기뻐하며 경배하세’로 곡의 길이가 남다르게 길다. 교향곡은 대개 4악장으로 지어지는데, 교향곡 하나에 4곡이 세트로 되어 있다. ‘합창 교향곡’은 1악장부터 3악장까지만 50분이 넘고 4악장만 20여 분이 소요된다. 합창단은 50분 넘게 미동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4악장이 되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솔리스트 4명이 들어오고 드디어 합창단도 일어선다. 폭풍 같은 연주로 4악장이 시작된 후 이윽고 바리톤 솔로가 이런 가사로 독창을 시작한다.
“오 친구여, 이런 소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악기만으로 50분 넘게 1, 2, 3악장을 연주해 놓고 ‘이건 아니다’라고? 베토벤의 이 말은 연주자와 관객에게 충격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공감한다.
우선 악기는 가사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훌륭한 연주자가 기쁨과 슬픔, 환호와 탄식과 같은 감정과 생각을 아무리 잘 형상화한다고 해도 이는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 즉 ‘은유’일 수밖에 없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언어’와 ‘목소리’를 주셨다. 그리고 그 소리는 아름답다. 베토벤은 이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비록 4악장 노래의 가사가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시를 바탕으로 베토벤이 각색했기에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교향곡의 주제를 직접 말해 준다.
“환희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이여, 우리는 열정에 취하여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간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제한하는 가장 큰 방해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표현을 억제하는 것이다. 우아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기질적 특성이나 체면에 속아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표현하는 일에 자신을 억누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시시콜콜 정확히 토하는 것은 그분의 명령이다(시62:8). 베토벤이 깨달은 바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목소리라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강력한 악기를 주셨다.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스3:11) 찬양할 때에 성령은 제한받지 않고 역사하신다. 바로 이때 사람이 우주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자 은혜인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손바닥 치며 찬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축복은 손바닥을 치며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무리가 우레처럼 손뼉을 치면, 마치 나이아가라 같은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필자도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많은 음악회에 참여하면서 무리의 박수 소리가 많은 양의 물이 떨어지거나 흐르는 소리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소름 돋는 전율을 느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시98:1)라고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소리에는 능력이 있다. 특히 성령으로 말미암은 소리에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춤으로 찬양
소리는 아니지만, 우리의 춤과 동작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올 때 왕으로서 지켜야 하는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살이 드러나도록 힘을 다하여 춤추며 기뻐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시30:11).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시149:3).
성경에는 춤을 추라는 명령이 여기저기 나온다. 손을 드는 행동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우리를 낮추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느8:6).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63:4).
찬양하고 기도할 때에 손을 높이 들고 싶은 감동이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감동이다. 주위 사람은 내가 손을 들었는지 춤을 추는지 신경 쓰지 않을 터인데 우리를 방해하는 생각과 기질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감동을 억제하고 성령을 제한한다.
넬슨 만델라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수감생활 한 후 흑백차별법을 폐지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던 날,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 위에서 추었던 춤을 잊을 수가 없다. 하물며 영원히 죽을 운명에서 건져진 우리에게서 흉악의 사슬들이 끊어질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감동이 올 때, 주님이 함께 계셔서 나를 안아 주심이 느껴질 때 어찌 춤추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 저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소서!
박성진
메리츠증권 상무 / 바이올리니스트
위 글은 교회신문 <43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