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0-06 00:48:48 ]
창조라는 빌미로 기괴한 발상이 가득한 음악도 있어
양심이 아니라 하는데도 무작정 인정하는 태도 버려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형상의 모양으로 지으셨다(창1:26).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면서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양심’과 ‘하나님을 알고 찾게 하는 특성’과 무엇이 아름답고 좋은지를 원천적으로 깨닫고 느끼는 ‘미적 분별력’을 넣어 주셨다.
음악을 전혀 접하지 않고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라도 피아노 건반 위에서 ‘도-미-솔’을 함께 누르면 “아! 듣기 좋다” 하고 ‘도-레-미’를 함께 누르면 “이상하네?”라고 한다. 일부러 가르치거나 외우게 하지 않아도 조화로운 ‘화음’과 조화롭지 않은 ‘불협화음’을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형상의 모양이기에, 그분의 미적인 기준, 즉 그분의 미학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음악을 선천적으로 알게 하신 하나님은 정확하고 질서정연한 분이시다. 음악 또한 정확한 시간 약속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조화로울 때 아름답다. 부분적으로 부조화처럼 느껴지는 패턴의 변화나 변형된 화음들도 하나의 선으로서 조화롭고 완벽하게 합쳐질수록 아름답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 음악계에 침투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려 한다. 즉 우리가 조화롭다고 느끼는 화음, 리듬, 패턴을 부수려 한다. 하나님의 사람인 ‘바흐’가 정리한 대위법이나 대가들이 정리한 화성학 체계를 부정하고 (1) 음과 음을 연결하는 선율의 파괴 (2)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리듬의 파괴 (3) 동시에 함께 소리 내는 화음의 파괴를 시도한다.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겠다고 한다. 여기에 영향받은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은 시끄러운 소리가 기괴하게 조합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다.
음악계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거세다. 요즘 연주회들은 제일 먼저 듣기 편한 고전 곡(전통적인 질서를 따르는 곡)을 레퍼토리로 편성하고 중간에 하나쯤 ‘기괴한’ 현대음악을 넣은 다음에 현대음악으로 말미암아 감동 없이 냉담해진 관객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어서 다시 고전 곡으로 마무리하는 추세다.
필자도 지인들 연주회에 자주 가는 편인데, 연주회를 마치면 칭송하는 사람들이 곁에 와서 늘 이런 식으로 말한다.
“선생님, 아주 좋았어요. 중간에 현대음악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고요”, 내지는 “현대음악도 ‘그 정도면’ 듣기 힘들지 않았어요.”
심지어 어떤 현대음악 곡은 이런 생각도 들게 한다.
‘저런 연주라면 연습 한 번 안 하고도 악보 없이도 하겠다. 아무거나 짚고 인상 쓰면서 뭐가 있는 듯이 마구 소리 내는 것쯤이야.’
음악 전문가들이 이런 말을 무식하다고 헐뜯을지 모르겠지만, 많은 예술가가 자기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어떤 사상인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인문학 분야에서 유명한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조차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손에 카드가 하나도 남지 않아야 이기는 훌라 게임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고 파괴할 줄만 알고 파괴한 자리에 남겨 놓을 창조적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한다.
음악에서는 현대 음악가들이 멜로디와 화성과 리듬을 파괴한 자리에 대신 집어넣은 기괴한 창작이 절대 아름답지 않음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쉽게 느끼므로 대안 없는 파괴가 ‘파괴를 위한 파괴’일 뿐임을 간단히 이해하게 해 준다. 현대음악을 옹호하는 예술가들은 “처음에는 이상하겠지만 계속해서 이런 장르를 반복해 듣다 보면 익숙해지고 좋다고 느낄 수도 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백 번, 천 번을 애써 참고 들어도 바흐, 베토벤의 소품 하나만 못하다는 것을.
미술계의 낙서인지 작품인지 모를 그림이나 조형물들, 행간의 의미와 운율은 모두 파괴하고 뜻이 통하지 않게 뜬금없는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나열한 해체 시 같은 문학작품들, 그리고 아무 음이나 나열하고 청중을 고통스럽게 하는 현대음악들. 급기야 이런 사조는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생물학적 체제도 파괴하고, ‘우리가 주장하는 성(性)이 진짜 성이다’라며 하나님께 대한 도전까지 수렴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불협화음을 아름답지 않게 느끼듯 동성애가 아름답지 않다고 양심으로 알고 있다. 다만, 이를 지적하면 왠지 무식하고, 전통에 얽매여 과잉판단하며, 세뇌당했고, 체제 순응적인 어용인(御用人)이라고 낙인찍힐까 봐 두려워하게 하여 침묵시킬 뿐이다.
박성진
메리츠증권 상무 / 바이올리니스트
위 글은 교회신문 <45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