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친해지기]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왜 욕을 먹는가?

등록날짜 [ 2015-11-24 22:22:20 ]

전문가들만 있는 곳은 오히려 잡음이 많기 마련

분쟁과 비난에 동조하지 말고 심판에서 벗어나야



“당신의 총에는 지금 총알이 세 발 들어 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지휘자, 살인자, 도둑놈, 이렇게 세 명이 서 있다. 이들을 향해 총을 쏠 참이라면 누구를 가장 먼저 쏘고 누구를 가장 나중에 쏘겠는가?”

 

보통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살인자’나 ‘도둑’을 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음악계에 있는 사람들은 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세 발 모두 지휘자를 향해 쏜다.”

 

이 말을 들은 사람 대부분이 ‘웬 지휘자?’라고 의아해할 것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만, 음악계의 속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뭐가 우습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관현악단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말에 배를 잡고 웃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케스트라에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곡을 연주해도, 그 음악을 (1)해석하는 방식, (2)표현하는 방식, (3)소화하는 능력이 각기 다르다. 여기에는 연주자의 인생 행보, 전공하는 악기, 연주력의 완성도와 개개인의 장단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지휘자’라는 사람은 결코 100% 일치할 수 없는 나와 다른 취향과 해석으로 내가 연주하기 불편한 방식을 내게 지시한다. 나름 ‘한가락’ 한다는 사람들은 짜증이 쌓인다. ‘내가 정말 잘 알아. 단언컨대, 이 부분은 이렇게 연주하면 안 돼’ 같은 생각도 올라온다.

 

그러다 지휘자가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가령 지휘자가 마디 수를 잘못 세거나, 연주하라는 신호를 애매하게 주거나 놓치기라도 하면-가차 없이 천하에 둘도 없는 역적이 된다. 베를린 필의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거의 평생 동안 파트 수석으로 지낸 사람도 기회만 되면 고인이 된 카라얀을 욕하는 것을 필자도 여러 번 들었다.

 

그나마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악장 같은 지휘체계를 두어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복종하게 할 수 있지만, 현악 4중주 같은 실내악 앙상블이라면 어떨까? 보통은 실내악 앙상블 연주단이 해체되지 않고 오래가는 곳은, 제1바이올린 혹은 다른 연주자들을 압도하는 대가가 리더로 있거나, 목소리 큰 한 명과 나머지 순둥이 멤버로 구성된 경우다.

 

한때 모 재벌그룹의 클래식 애호가 회장님이 국내 최정상 연주가들을 선정해 현악 4중주 드림팀을 구성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멤버가 출중하다 보니, 의견 충돌이 계속되고 관계가 악화해 결국 연주회 직전 리허설 한번 하고 본게임에 들어가는 시스템이 됐을 정도니, 전문가들의 융합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강력한 망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든 문제를 못으로 보려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자신이 잘하거나 잘 아는 것을 중심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주인 된 ‘잘하는 사람’을 쓰지 않으시고 예수가 주인이 된 사람을 쓰신다. 갈릴리 바다에서 빠져 죽을 처지에 놓인 전문 뱃사람 제자들이 유일하게 잘한 것은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운 일이다.

 

지구상에서 자신이 ‘잘 안다’던 교만을 가장 애통해했을 사람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그는 형 예수와 한 부모 밑에서 같은 집에서 자랐다. 그러나 자신이 100% 확신하는 ‘경험과 지식’은 사실 독이었다. 자신과 생김새도 닮지 않은 형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집을 나갔다가, 어머니로 하여금 자식이 십자가에 달려 끔찍하게 서서히 죽어 가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게 한 사무치는 원망과 비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의 형이 하나님이었음을 알았다. 자신이 주인으로 쌓아 올리고 가장 자신한 지식이 배설물임을 몸서리치게 깨달았다. 형 예수의 반대자였던 동생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말고, 서로 원망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시기와 다툼을 제하고, 혀가 우리 인생 전체를 불사르는 악이며 형제를 원망하지 말아야 심판을 피한다는 성령의 감동을 부활의 증거와 함께 더욱 구구절절이 전해 주는 것 같다.

 

다른 사회는 몰라도, 교회가 세상의 ‘한가닥’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면 끝이다. 필자가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 날마다 기도 응답으로 사는 성도들은 교회 안이건 밖이건 자기가 있는 곳에서 비난하고 분쟁하는 소리가 들리면 조용히 자리를 뜬다. 결코 함께 가담하는 법이 없다. 그 자리에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이 핏값으로 사신 형제를 판단하면, 기도와 응답이 막히는 것을 성경 말씀으로 알고 체험으로 한 사람들이다.

 

야고보서 4장 1~3절, 지체와 다투고 싸우고 시기하고 살인하는 정욕으로는 (1)구하지도 못하고 (2)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을 주님 은혜로 깨닫고 혀에 재갈을 물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만일 “총알 세 개를 가지고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을 받으면, “하나도 쓸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박성진

메리츠증권 상무 / 바이올리니스트


 

위 글은 교회신문 <46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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