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친해지기] 길거리에 나온 바이올린 명연주자

등록날짜 [ 2015-12-23 13:04:08 ]

아무리 뛰어난 연주가라 할지라도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이듯

주님도 당시에는 많은 오해와 천대 속에 복음을 전했을 것

지하철역에서 연주하는 미국 바이올린 명연주가 조슈아 벨.



영화 ‘레드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명기(名器)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세기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애환이 얽혀 있는지를 그렸다. 그 영화에서 실제 연주를 맡아 유명해진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 바로 ‘조슈아 벨’(Joshua Bell)이다. ‘꽃미남 외모’, ‘정상급의 연주 기량’, ‘최고의 경력’이라는 삼 박자를 갖춘, 미국 국적 연주가이자, 오늘날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조슈아 벨은 첫 앨범을 발매한 2000년에 그래미상을 거머쥐었고, 그 후로도 <빌보드>지 선정 최우수 클래식 음반상을 비롯해 권위 있는 상을 수없이 받았다.

 

또 그의 바이올린은 일반인도 잘 알고 있는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다. 조슈아 벨의 스트라디바리우스는 300만 달러(한화가치 약 35억 원)짜리로 ‘레드 바이올린’이란 영화 주인공에 걸맞은 명기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 조슈아 벨이 <워싱턴 포스트>지(誌)와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2007년 1월 12일 워싱턴 D.C. 지하철 랑팡역에서 허름한 라운드티 차림에 야구 모자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했다.

 

몰래카메라로 그 장면을 기록했는데, 1097명이 조슈아 벨의 연주 장소를 지나쳤고, 그중 7명이 그의 연주를 들으려고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단 한 명만 유명한 조슈아 벨을 알아봤다. 45분간 연주했는데, 그동안 조슈아 벨을 알아챈 한 명이 던진 20달러를 제외하고는 27명에게서 32달러 17센트만 거둬들였다. 3일 후, 조슈아 벨은 공연장에서 똑같은 곡을 연주했고,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 이 실험 내용으로 칼럼을 쓴 <워싱턴 포스트> 진 바인가르텐은 200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유명한 비루투오소(정상의 연주 대가를 일컫는 말)가 지하철역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연주를 한다고 해서 그 음악성마저 바뀌는 것은 아닐 터다. 하지만 외모와 환경을 중요시하는 세상에서는 이를 알아보기 어렵다. 필자도 조슈아 벨의 한국 공연을 직접 감상했는데, 만약 위와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잠시 멈춰 서서 ‘어? 길거리 연주자가 이렇게나 훌륭한 소리를 낼 수 있나?’ 하며 매우 의아해했겠지만, 설마 그 연주자가 세계적인 조슈아 벨일 줄 짐작조차 못 했을 듯싶다.

 

현대인들은 다들 바쁘게 살고, 걸을 때도 나름대로 행선지가 분명하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 파묻혀 살기에 길거리에서 만난 유명한 대가의 연주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러니 전능자 하나님께서 촌구석에서 목수로 일하는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것을 어찌 알아보겠는가. 3년 6개월간 쫓아다니던 제자들도 예수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귀의 방식대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주인 행세하는 허무한 삶, 그 죗값으로 지옥 갈 우리의 삶을 끝내시려고 오신 바로 그 하나님이신 줄 눈치라도 챘을까? 그저 ‘이 사람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며 의아히 여겼을 뿐이다.

 

조슈아 벨의 지하철 일화를 접하면서, 우리 인생은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스승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눅24:13~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삼 일 후에 살아나실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 보고서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며 알아보았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잡히시자마자 다들 도망친 겁쟁이였지만, 이후 성령 받자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 부활을 증거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거짓말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자기 목숨을 처참히 내줄 수 없다. 한마디로 제자들의 증거는 명확하다. 우리는 언제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삶을 버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려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주인 대접하며 살까.

 

이제 성탄절이다. 필자도 이맘때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신나게 불렀다. 그러다 우리 주님의 입장에서 주님의 마음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너희를 위해 대신 처참하게 죽으러 육신 되어 왔어. 세상 누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줄 정확히 알면서 태어나겠니? 그런데 너는 마냥 기쁘기만 하니?’

 

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래!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죽어 줄 수 있어 기쁘다.” 우리 주님의 입장에서 주님의 성탄을 생각하면 도무지 들뜨고 방종할 수 없다. 우리 교회 전 교인이 ‘성탄절 감사찬양’을 하면서 ‘살아 계신 주’를 찬양하고 감격의 눈물로 예배드릴 일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 벅차다.

박성진

바이올리니스트

연세중앙교회 오케스트라
 

위 글은 교회신문 <4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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