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2-20 22:03:49 ]
유난히 긴 허리와 팔과 다리, 길쭉한 얼굴로 인물 표현
감각적인 색채 사용하여 표현주의에 가까운 특징 보여
엘 그레코 作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1600년,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 106×130㎝)
16세기 에스파냐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였으나 베네치아와 로마와 스페인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방인 화가 그리스인’이라는 뜻을 가진 ‘엘 그레코’라는 이름이 붙었다.
엘 그레코는 미술 공부를 하려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르네상스 회화 양식과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인체표현을 습득했고,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의 공방에서 일하며 색채 표현과 구도 기법을 배웠다.
당시 유럽은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를 비롯해 뛰어난 예술가들이 완벽한 인체 묘사와 풍부한 색채 사용, 안정된 공간구도를 갖춘 화풍으로 유럽 회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절정에 이르렀던 전성기 르네상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성 회화의 지루함을 극복하고자 독창적인 예술작품이 점차 시도되었다. 길게 늘어뜨린 인체 비례와 환상적이면서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등장했다. 엘 그레코는 특이하고 개성 있는 작품으로 후기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풍에 합류했다.
엘 그레코는 유난히도 긴 허리와 팔 다리, 길쭉한 얼굴로 인물을 표현했고, 색채를 감각적으로 사용해 표현주의에 가까운 근대 예술의 특징을 보여 주었다. 엘 그레코는 <수태고지>, <목자들의 경배>, <소경을 치료하는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베드로의 눈물> 등 많은 기독교 관련 그림을 남겼는데, 차갑고 강렬한 색채와 오묘한 빛은 신비스러운 영적 분위기를 더욱 부각했다.
엘 그레코 作 <목자들의 경배>(1612~1614년경,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319×180㎝)
엘 그레코의 작품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는 모습을 담았다.
당시 유대인은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세로 반 세겔을 냈고, 제사할 때 필요한 제물을 준비했다. 성전세를 낼 때는 유대인 화폐인 세겔 외에 외국 돈으로는 낼 수 없었기에 웃돈을 받는 환전 상인이 성행했다. 또 흠이 없는 깨끗한 제물을 드리려면 값비싼 제물을 사야 했는데 가축 상인들도 몇 갑절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겼다.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일에 사용돼야 할 거룩한 성전이 장사꾼들로 북적이는 매매장소가 돼 버린 것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21:13).
그림의 중앙에는 채찍을 든 예수가 환전 상인들과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을 향해 단호하게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편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림의 배경인 성전 양 벽에 새겨진 부조를 자세히 보면, 왼편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오른편에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묘사해 놓았다.
아담과 하와로 인류에게 죄가 역사하였음을 상기시키고,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심을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친히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하셨으니 이제는 제물을 잡아 드리거나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길을 열어 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9:12).
엘 그레코는 초상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세기 유럽 미술 거장 벨라스케스의 찬사를 받을 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인물 묘사에 탁월해 귀족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많은 주문을 받았다.
엘 그레코는 생전에 자신의 독창적인 화법과 재능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심하게 뒤틀리고 늘어뜨린 인물 표현과 신비스럽고 기괴한 색채 감각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충격적인 작품으로 다가왔다. 20세기에 들어선 후에야 현대 표현주의와 추상예술에 재발견되어 그의 선구적인 재능과 안목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문준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7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