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슈만의 교향곡을 연주하며

등록날짜 [ 2016-07-19 17:52:00 ]

변화무쌍한 감정 기복이 음악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그래도 연주자는 그 곡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유학 시절, 어느 교수님이 이런 말씀하셨다.

“음악가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작곡가 또는 작품일지라도 그 곡을 연주하게 된 이상 무조건 그 곡을 사랑해야 한다.”

당시에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교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절실히 깨닫는다.

지난주 목요일, 필자가 이끄는 충남교향악단과 함께 공주문예회관에서 슈만의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독일 낭만파 작곡가인 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피아노에 특별히 애착을 보인 음악가다.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고도로 집중해 연습하던 중 손가락 근육이 파열되는 바람에 그만뒀다니 그 열정은 더 말할 것이 없을 정도다.

슈만은 주옥같은 독일 가곡을 많이 작곡했다. 특히 반주 역할에 그치던 피아노를 예술적 가치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평론가로서, 교육자로서도 당대에 명성을 날렸다. 슈만은 독일 음악의 전통을 계승할 위대한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를 첫눈에 알아보고 세상에 소개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한 마디로, 슈만이 없었다면 브람스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다양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슈만은 교향곡 4곡을 썼다. 그의 교향곡에 담긴 서정적인 멜로디와 감성이 주옥같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필자는 그 교향곡 작품 속에서 슈만의 다른 피아노곡에서 만큼 강한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 슈만이 천상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번 ‘교향곡 4번’ 연주를 앞두고 오케스트라 총연습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도 항상 그 점이 문제였다. 수많은 악기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는 피아노나 여타 개별 악기와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만약 ‘교향곡 4번’이 피아노곡이었다면 피아니스트 한 명이 주제와 부주제와 화음을 주된 부분과 리듬 부분의 역할로 잘 나누어서 연주하면 된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악기마다 한 부분씩을 맡는다. 따라서 연주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잘 인지해서 그것에 맞게 연주해야 한다. 한 마디로 똑같이 ‘포르테(강하게 연주하는 부분)’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포르테가 아니라는 뜻이다.

또 슈만의 교향곡은 멜로디 흐름을 여러 파트가 나누어 연주하는 부분도 많아 항상 집중해야 한다. 반주 파트가 잠깐 멜로디 파트를 한 후 다시 반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 반대 경우도 허다하다.

그 때문에 연주자들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실수할 때가 많다. 지휘자는 그런 부분을 각성시키고 긴장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슈만의 곡을 연주할 때 어려운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변화무쌍한 감정 기복이다. 슈만은 조울증을 겪을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했고, 나중에는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음악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예전에 어떤 지휘자가 슈만의 곡을 연습하면서 마치 “독일 날씨 같다”고 말했다. 독일 날씨는 햇살이 비취다가 갑자기 구름이 끼고, 소낙비가 오나 싶으면 활짝 갠다. 참 적절한 비유인 듯싶다.

필자는 까다롭다는 핑계로 슈만 교향곡을 잘 연주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연주하면서 그런 까다로운 부분이 오히려 그의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와서 슈만을 사랑하게 되었다. “모든 음악을 사랑해야 한다” 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 다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우리 크리스천은 만나는 모든 영혼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설령 이런저런 이유로 그 사람이 까다롭고 불편하다 싶어도,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또 사랑하다 보면 대하기 불편한 부분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마치 슈만의 교향곡처럼 말이다. 특히나 음악작품은 작곡가와 지휘자, 연주자의 고뇌와 수고라는 값이 지불된 것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한사람, 한 사람의 영혼들은 우리 주님이 대신 죽어주신 피의 대가가 지불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윤승업 지휘자
충남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연세중앙교회 찬양대 상임지휘자


슈만 교향곡 4번

위 글은 교회신문 <4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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