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11-14 15:07:37 ]
오직 성경 붙들고 신앙 개혁 이끈 마르틴 루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등 많은 곡 작곡하고 교회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
독일 유학 시절, 필자는 한인교회 청년들과 함께 튀링겐주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마을과 성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500년 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신앙 개혁을 주도한 후 이 성에 은둔하며 성경을 번역했다. 우리는 성을 관람하고 광장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다. 마르틴 루터의 신앙 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날, 특별한 기념 이벤트를 한 셈이다. 바르트부르크 마을을 방문한 기억을 되새기며 신학자이자 작곡가였던 루터가 어떤 심정으로 신앙을 개혁하고 찬송가를 작곡했는지 살펴보자.
성경만 믿고 개혁 진행해
1515년, 중세 가톨릭교회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충당하려고 ‘면죄부’를 판매했다. 당시 설교자들은 “현세에 사는 후손이 면죄부를 사면 연옥 불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조상이 천국에 간다”며 새빨간 거짓말로 효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면죄부를 사는 순간, 미래에 저지를 죄까지 면제된다고 선전했다. 면죄부는 많은 폐단을 낳았다. ‘도둑질 면죄부’를 산 어떤 이는 “미리 용서받았다”면서 면죄부 판매금을 통째로 훔쳐 사라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가톨릭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 행위를 맹렬히 비판했다.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교회의 폐단을 항의하는 ‘세기의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항의문은 독일어로 번역된 후 독일 전역에 널리 퍼져나갔고 동조자도 급속히 늘었다. 루터의 행동은 당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 셈이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파문 교서’를 공포했다. 하지만 루터는 파문 교서 사본과 교회 법전을 보란 듯이 불태웠다. 다음 해 봄에는 독일 남서부 보름스 시(市)로 소환됐다.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에게 견해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오직 성경을 따를 뿐입니다. 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이며, 신앙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절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황제는 루터를 이단자로 선포했다. 저서를 불태우고 루터에게 모든 지원을 금하라고 명했다. 루터가 추방되자 작센 주(州) 선제후(選帝侯, 신성 로마제국에서 독일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명의 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은 자신의 바르트부르크 성을 도피처로 제공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서 1년 가까이 숨어 지내면서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1522년 루터 추종자들은 독일어 성경을 출판했는데 이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성경은 라틴어를 익힌 성직자의 독점물이었다. 그런데 독일어로 번역되자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
<사진설명> 루터가 1년간 은거하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신앙 개혁 사상을 퍼뜨린 바르트부르크 성.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100만 부가 팔릴 만큼 신앙 개혁 사상은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사제의 노래에서 회중의 찬양으로
루터는 신앙 개혁을 일으켜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르네상스 시대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가톨릭교회 음악은 일반 회중을 소외시켰다. 수도원에서 수도승끼리 청중 없이 부르거나, 미사를 집전할 때도 찬양 전문가인 성가대원만이 가창을 담당했다. 신앙 개혁 직전, 교회의 다성부(多聲部) 음악은 난해하고 복잡했다. 게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가사까지 더해 평민은 함께 찬양할 수 없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어려운 라틴어 찬양 대신 독일어 회중 찬송 ‘코랄(Chorale)’을 부르게 했다. “만약 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루터는 작곡 능력이 탁월했다. 루터는 독일 민요에 찬송 가사를 붙여 일반 회중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하여 기독교 음악 발전을 이끌었다. 마흔 살이 넘어서 시작해 평생 42곡을 작사했는데, 그 중 36곡이 찬송가다. 루터가 작곡한 음악 중 대표 찬송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다. 이 곡은 성경 번역을 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지은 곡이다.
500년 전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작곡해 민중과 함께 부르며 투쟁을 벌였다. 또 성경을 기름 등불 아래 필사(筆寫)해서 전국에 퍼뜨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영혼을 사랑하라는 진리의 말씀 앞에 루터는 그 당시 교회의 폐단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면죄부만 사면 구원 받는다고 평생 오해한다. 그러다 온전히 회개하지 못해 지옥에 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루터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대중화했다. 이후 인쇄술이 더욱 발달하고 악보와 기보법이 확립되자 당시 사제들만 올려드리던 찬양을 대중도 부를 수 있게 됐다. 구원받은 은혜를 바로 알고 주님께 찬양할 길이 열린 것이다.
현 시대에도 개혁 필요해
지금 대한민국은 나라 안팎으로 크게 요동하고 있다. 북한은 핵으로 위협하고 있고 종북세력은 종횡무진 판을 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 위배하는 동성애 관련 법안은 국회에 꾸준히 상정되고 있다. 교계 내부에서도 세속화와 기복신앙이 참 신앙생활을 오도하고 있다. 하나님께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세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위협받고 있다.
이제는 다시 한 번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외치면서 교회와 성도들이 일어날 때다. 우리 모든 성도는 지옥 갈 자를 살려주시려 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죽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피 공로를 붙들고 담대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500년 전, 두려움 없이 나아간 루터의 ‘믿음의 행진’을 이어가자.
/박은혜
연세중앙교회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위 글은 교회신문 <55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