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8-02-06 14:56:46 ]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는 이탈리아 화가다. 본명은 ‘파올로 칼리아리’인데 고향이 베로나(Verona)여서 ‘베로네세’라고 불렀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그는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의 영향을 많이 받아, 주로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를 띤 장식화를 그렸다. 밝고 풍부한 색상과 낙천적인 화풍으로 베네치아파 회화를 전성기로 이끌어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로 손꼽힌다.
베로네세는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삼더라도 초자연적인 것을 묘사보다 사실 관점에서 경쾌하고 화려한 축제 분위기를 즐겨 그렸다. 베로네세 화풍의 특색을 떠올리며 두 작품을 감상해 보자.
<사진설명> <가나의 혼인잔치> (1563, 캔버스에 유채, 666×990cm, 루브르 박물관)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가나(지명)는 예수님이 첫 이적을 행하신 장소다. <가나의 혼인잔치> (1563, 캔버스에 유채, 666×990cm, 루브르 박물관) 작품에는 마을에서 열린 혼인잔치에 초대된 예수와 열두 제자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화가 베로네세는 작품 배경을 갈릴리 가나가 아니라 16세기 베네치아로 바꿨다. 고대 이탈리아 신전에서 볼 법한 높고 큰 대리석 기둥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이 작품은 화가 특유의 거침없는 재능을 투영해 신앙적 엄숙함보다는 세속적 의식인 피로연을 즐기는, 인물들의 즐겁고 들뜬 베네치아 취향 정경을 좌우 대칭 구도로 그렸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제자들, 각지에서 모여든 결혼 축하객, 악사, 시종과 광대 등 수많은 인물이 어울려 흥겨운 잔치가 무르익어 간다. 베로네세는 인종(人種)을 가리지 않고 132명이 등장하는 압도적인 그림에 이적의 장면을 표현했다.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예수님은 후광이 비취는 작품 중심 테이블 한가운데 앉아 있고, 양편으로 마리아와 제자들을 배치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수수한 옷차림인 데 반해, 축하객은 전통 복장을 하거나 베네치아 상류층이 즐겨 입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유럽 왕들과 귀족들을 모델로 삼았다. 잔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맨 왼쪽에 앉아 시종에게 포도주잔을 받고 있다.
잔치 중에 포도주가 바닥나자 예수님은 항아리에 채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잔치 주관자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 그림 오른쪽 하인이 따르는 물이 포도주로 변해 주전자에서 콸콸 쏟아진다. 서서 그 맛을 시음하는 잔치 주관자는 베로네세의 동생 ‘베네데토’다. 그도 화가였는데 재능은 형에 미치지 못했다.
악사 넷이 예수님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 베네치아파 화가를 모델로 그렸다. 흰옷을 입고 비올라를 연주하는 악사가 바로 베로네세다. 티치아노는 콘트라베이스,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는 플루트, 틴토레토(Tintoretto, 1519~1594)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잔치를 흥겹게 끌어간다.
이 악단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에는 모래시계가 놓여 있다. 이것은 잔치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과 물질적 쾌락은 순간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림을 통해 당시 유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호화로운 옷차림을 한 인물들, 화려하게 수놓은 테이블보와 갖가지 식기와 악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잔치의 흥겨움 속으로 빠져드는 16세기 풍 호사스러운 향연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설명> <천사의 부축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1584, 캔버스에 유채, 108×180cm, 이탈리아 브레라 미술관)
<천사의 부축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 (1584, 캔버스에 유채, 108×180cm, 이탈리아 브레라 미술관)는 베로네세의 완숙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낙천적이고 화려한 그의 화풍을 자제하면서 어둡고 침통한 예수님의 내면세계를 세련된 기법으로 그렸다. 천사와 예수님이 입은 옷 색깔과 명암 대비는 그의 화풍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2~44).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고난에 대해 두려움을 고백하면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머지않아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혼신을 다해 땀이 핏방울같이 떨어지도록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심신이 지친 예수님을 부축하고 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더라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비장함이 넘친다.
화면 전체에 청회색 빛 어둠이 덮여 있으나 왼쪽 위에서 쏟아지는 신비로운 한 줄기 빛이 기도로 지친 예수님의 몸을 부축하는 천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색채는 여전히 장식적이지만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면서 빛을 통해 더욱 신비해지고 있다. 오른쪽 아래로 무너진 고대 신전 폐허를 배경 삼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어둠에 묻혀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다.
빛 속에 드러나는 천사의 애틋한 표정과 팔을 늘어뜨린 채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비통해하는 예수님 모습이 잘 어우러져 더없이 절박하고 비극적인 느낌을 고조한다.
/박소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5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