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5-20 14:44:07 ]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
복음 전도 위해 찬송가 번역
한글 운율에 맞는 가사와
부르기 쉬운 가락으로
수십 년 동안 번역·편곡 작업
그들 노고 알면 찬송 더 은혜돼
우리 교회는 찬양을 매우 중요시한다. 예배 때 찬양하면서 회개와 감사를 고백하다 보면 마음 문이 많이 열려서 설교 말씀에 큰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찬양이 들어온 역사를 소개하면서 찬송가가 우리 민족의 찬양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본다.
7음계 찬송을 5음계로 바꿔서 불러
1884년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 선교사들이 소개한 찬송가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는 완전히 딴판인 음악이었다. 서양 문화권에서 발전한 기독교 음악은 우리 전통음악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조선 사람들은 난생처음 듣는 찬송가를 낯설어했다. 이후에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와 언더우드(1859~1916)는 영어 찬송가 50여 편을 따로 번역해 사용했다. 선교사들은 찬송가가 전도에 유용하다고 보았기에 찬양을 매우 중요시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사경회(査經會·부흥회)에서 찬송가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서양식 오선지를 읽을 수 없었기에 악보보다는 가사를 외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사경회를 마친 후 각자 암기한 찬송가 가락은 천차만별이었다. 예배 때도 악보 없이 찬송가 가사를 큰 족자에 써서 벽에 걸어 놓고 불러서 원래 찬송가 가락과는 거리가 있었다. 7음 장조와 단조 음계를 사용하는 서양 곡조를 5음계 조선식으로 변형해서 불렀다.
폴 그로브(Paul L. Grove) 선교사는 조선인이 서양 찬송가를 자기 방식대로 부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서울에서 맞은 첫 주일에 가장 큰 집회에 참석했는데, 조선인 수백 명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한국인들은 비음악적’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이후 그로브는 찬송가 번역에 앞장선 애니 베어드(Annie Baird, 한국 이름 안애리)의 ‘창가집(1915)’에 수록된 ‘삼위를 찬송함’에서 모든 반음을 없애고 한국 전통음악에 가깝게 편곡했다. 당시 조선인들이 쉽게 부르게 만든 곡이 지금 통일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다.
<사진설명> 120년 전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피아노를 짐꾼들이 상여 막대를 이용해 옮기고 있다. 1900년대 초 경남 지역에서 선교한 미국 북장로교 소속 리처드 사이드보담 목사는 부산항에서 발령지인 대구로 가면서 아내의 피아노도 함께 옮겼다.
처음엔 번역 찬송가 가사 너무 난해해
찬양이 복음 전도에 중요하다고 인식했지만 조선인에게 서양 찬송가를 가르치기는 어려웠다. 음악 교육할 교사가 부족했고, 조선인 신자들은 원래 곡조와는 전혀 다르게 노래를 변형해 불렀기 때문이다. 조선인에게 맞는 가사도 문제였다. 초기 찬송가 번역은 한글과 영어의 운율이 맞지 않아 이를 편집하는 작업이 어려웠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찬송가 번역은 조선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난해해 잘 사용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 찬송가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은 한국의 전통 율격과 곡조를 고려한 베어드의 번역 가사를 취했다. 초창기의 ‘예수 사랑하심은’ 번역 가사와 괄호 속 베어드의 가사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 날 사랑함을 성경으로 내 아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보배 피 흘림으로 두련 맘 업시하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성경으로 내 아오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초대 음악가들
교회 풍금 소리로 음악 배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초대 음악가들은 대부분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풍금 소리를 듣고 음악을 배웠다. 그들은 아름답고 신기한 풍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예배 시간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교회에서 음악적 심상을 기른 음악가들은 선교사들에게 기본적인 재질을 확인받은 후 미션 스쿨이나 유학을 통해 더 큰 배움의 길을 열어 갔다. 현재 한국인의 음악 수준이 놀랄 만큼 발전해 세계에 찬란한 예술 꽃을 피우고 있는 것도 예배당에서 울려 퍼진 찬송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고자 목숨 걸고 이 땅을 밟았다. 또 조선인에게 예수를 알리고자 수십 년에 걸쳐 찬송가를 수정하고 다듬어 오늘날까지 전했다. 그들의 눈물 뿌린 기도와 노고를 생각해 보면,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에 감사하지 못한 것은 물론 막연하게 입만 뻐끔뻐끔하며 찬양한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을 통해 현재 아름다운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어 감사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6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