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복음성가 <부럽지 않네>

등록날짜 [ 2021-08-17 13:45:16 ]

일제 강점기 당시 천국 소망 

가득한 가사로 조선 성도 위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면 찬송 저절로 나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지역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린다고 해서 집에서 8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교회로 달려갑니다. 은혜받을 생각에 배고픈 것도 잊고 맨발로 뛰어갑니다. 교회에 도착해 설교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을 올려다보니 턱수염이 아주 무성합니다. 전국을 다니시면서 부흥목사로 주님께 쓰임받던 이성봉 목사님입니다.


당시 설교하시는 목사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천사처럼 그렇게 환할 수 없어요. 말씀 듣는 이들과 무언가 다른 영적으로 충만한 생명을 가지신 분 같아요. 그리고 그분이 설교 도중 찬양할 때마다 구원의 은혜가 가득한 찬양을 하십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하지 않아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 윤석전 목사 설교 中


천국 소망 가득한 찬양과 부흥회

한국 교회사에서 이성봉 목사는 빠뜨릴 수 없는 분이다. 이성봉 목사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열어 설교할 때마다 복음성가를 많이 불렀고, 직접 복음성가 가사도 많이 작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성봉 목사의 집회는 초교파적 성격을 띠었고, 교파를 불문하고 초청에 응했다. 어느 한 교회에서 집회를 열면 이웃에 있던 교회에서도 같이 참가해 은혜를 나눴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희망이 없는 현세의 삶에서도 천국 소망을 기대하며 위로받곤 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한 신앙은 가혹한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순교까지도 감당케 하는 한국 교회의 버팀목이었다. 세상 부귀영화보다 영생을 사모한다는 복음성가 <부럽지 않네>는 해방 전후로 많은 성도가 부르곤 했다. 새로운출판사가 1997년에 발행한 『새로운 복음성가』 제40장에 실린 가사를 소개한다.


1.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2.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 날 부러워해

    성령 충만 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3.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부귀영화 부럽지 않네

    예수님의 신부 될 것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4.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하늘나라 천군천사 날 부러워해

    영원토록 누릴 영화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일제 치하에서도 담대하게

1941년부터 만주에서 사역하던 이성봉 목사는 황해도 황주와 사리원에서 간절하게 초청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사리원 경찰서에는 ‘호시’라는 형사부장이 기독교인을 특히 미워하고 괴롭혔다. 형사부장은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듣고 당장 체포했다.


“당신, 겁이 없구먼. 때가 어느 때인데 이런 설교를 하는가.”


“때가 어느 때인가. 일본이 망할 때지.”


“아니, 이놈이 겁 없이 무슨 근거로 이런 소리를 떠들어.”


“성경에 다 나와 있으니 성경을 한번 봐라.”


호시 형사부장은 이 목사를 발가벗겨 차가운 유치장에 가둬 놓고 온갖 모욕을 다 주었지만 이 목사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참았다. 이 목사는 유치장에 갇혀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바울도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쓰시기 위해 바울처럼 옥에 가뒀으니 이 증거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렇게 시련조차 주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이 목사를 비롯해 집회에 참가했다가 같이 체포당한 장로·집사들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있었다. 반면 이들을 옥에 가둔 호시 부장은 발진티푸스에 걸려 “아이고 예수쟁이, 아이고 예수쟁이” 하며 앓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목사 일행은 결국 6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라고 생각한 이 목사 일행은 감사의 찬송과 기도를 했다.


1945년 해방이 됐다. 이후 이성봉 목사는 교단재건운동에 나섰다. 서울신학교 학장으로 1년간 일한 후 “나는 아무래도 부흥목사가 제격”이라며 사임했고, 전국의 가난한 교회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큰 교회들은 부흥강사를 청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교회들을 택하여 집중적으로 전도운동을 했다.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

위 글은 교회신문 <71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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