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예수생애부흥사회 목회자, CBS 제작진 등 19명이 지난 10월 5~7일 CBS 주관으로 일본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에 나섰다. 성지순례팀은 나가사키현을 중심으로 26인 순교자 승선 유적지, 스즈타로 감옥 터 위에 세워진 기념비<사진>, 131명의 순교자와 가족들이 헤어졌다는 처자 이별의 바위, 오오무라 처형장, 머리 무덤, 운젠 지옥과 시마바라성 자료관 방문을 끝으로 순례일정을 모두 마쳤다. ‘선교사의 무덤’이라는 별명과 함께 수십만 명이 순교한 일본의 성지에서 초대교회 제자들이 받았던 박해와 순교에 버금갈 만큼 잔인한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피 흘린 발자취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생생히 증언되고 있어 순례단 일행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윤석전 목사는 “이번 일본 기독교 성지순례의 길은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본 땅의 순교자들과 같이 목숨을 바쳐 복음을 지키고 전하는 일만이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가장 값지게 쓰는 것이다”라며 “성령께 인도받는 성령의 사람으로 목회하자”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임성곤 목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고통을 당하다가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일본 땅의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라면서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다시 한 번 일본 땅에 복음의 불씨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한다”는 감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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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지순례 길에 오른 윤석전 목사와 예수생애부흥사회 19명의 목회자 일행은 10월 5일 오후 6시 3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20분 만에 일본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일본 성지순례를 계획하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6일 이른 아침 출발예배를 드린 순례단은 현지 교회에서 사역 중인 현승건 목사의 안내를 받아 나가사키현의 순교의 피를 흘린 유적지를 찾아나섰다.
수십만 명이 순교한 ‘선교사의 무덤’ 일본
일본은 1549년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교회 내의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내부적인 교회개혁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개혁운동은 세계 선교로 이어졌다. 가톨릭 내부의 개혁운동은 타락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돌이켜 초대교회 순교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순교의 신앙이 신실한 선교사들을 통해 일본에서 실현된 것이다.
일본 최초 선교사 프란치스코 자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도착하여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는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부패한 관리와 승려들을 질책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불타는 심장을 가지고 일본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기에 일본 최초의 크리스천 영주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오무라 영주인 스미타다였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영주가 크리스천이 되자 6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오오무라 성의 모든 주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일본에 복음이 들어온 지 불과 50여 년 만에 일본 전체 인구의 5%에 달하는 70여 만 명의 신자라는 성과를 거두게 됐다. 그러나 처음에 키리스탄(크리스천)들의 선교를 묵인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구열강을 견제하기 위해 키리스탄에 대한 강경정책을 행했고 결국 1587년 ‘키리스탄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한 이후 크리스천에 대한 수난과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크리스천 순교자 26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키리스탄 처형 명령으로 1597년 1월 1일 교토에서 체포된 사람은 모두 24명. 이 가운데는 12세, 13세, 14세 어린 소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백성에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이들의 왼쪽 귀를 자르도록 명령했고 24명은 귀가 잘려 곪아가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또한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1,000㎞라는 긴 거리를 포승에 묶인 채로 끌려왔는데 부르튼 발로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지만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천사와 같은 얼굴로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가 이들을 나가사키까지 끌고 가서 처형하도록 한 것은 전 도시가 복음을 받아들여 6만 명의 크리스천이 사는 나가사키 지역에서 참상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24명을 시중들던 2명이 함께 순교할 것을 자청해 순교자는 26인이 되었다<사진 1>.
1597년 2월 5일 아침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 세워진 26개의 십자가를 보자 26인은 기쁨으로 달려가 자기가 달려 죽을 십자가를 끌어안았고 4천여 명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린 채 창으로 가슴을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시편을 외웠다고 전해진다. 가장 어린 12살의 루도비코에게 ‘키리스토교를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루도비코는 ‘잠시뿐인 인생과 영원한 생명을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거절했다. 순교자들의 유체는 그 후 80일간 십자가에 달린 채 방치되었다. 45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나가사키 언덕에는 26인의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졌다<사진 2>.
기념관에 전시된 석자감옥<사진 3>은 크리스천들이 당한 고통을 말해주는 듯했다. 약 1m×1m×1m 크기의 나무로 만든 이 감옥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내놓고 크리스천들을 가둔 채 한겨울에도 일어서거나 누울 수 없게 하여 죽을 때까지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했다는 감옥이었으니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했던 크리스천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전국적인 박해와 순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전국을 지배하는 최고의 지도자로 등장하고 나서 1614년 1월 31일 도쿠가와 바쿠후는 전국적인 키리스탄 금교령을 발표하고 밀고자에게는 포상금까지 지급하며 키리스탄 적발을 강화하였다. 선교사를 신고한 자에게는 은화 500냥, 수도사는 은화 300냥을 주었다. 그리고 ‘5호 연좌가구’를 만들어 다섯 가정을 한데 묶어 이 중에 한 명이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면 다섯 가정 식구들을 모두 죽이고 해당 마을 촌장까지 처형했다.
일본 최초 26명의 순교가 일어난 지 25년 후인 1622년 9월 10일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 또 다시 순교의 피가 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 56명이 처형된 ‘원화 대 순교’다.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 25명이 기둥에 묶인 채 히아부리 형(장작불에 천천히 그을려 죽이는 화형)으로 순교하는 동안 선교사를 숨겨 준 사람과 가족까지 31명의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오오무라의 스즈타로 감옥<1면 사진>은 산 위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스피노라 선교사를 비롯한 크리스천들은 1618년 12월 15일부터 1622년 9월 9일까지 3년 9개월 동안 겨우 6평 남짓 되는 곳에 최고 33명까지 갇혔다가 목이 잘려 처형되기도 하고, 불에 타서 화형당하기도 했다. 종신형을 받고 이곳에 갇혔던 당시 10세, 11세의 형제는 60여 년 동안 갇혔다가 75세와 74세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예수를 부인하면 당장 풀어준다고 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스즈타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나는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기쁘다’라고 찬양을 하며 ‘후에 지옥의 좁은 거처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보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기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금교령이 발표된 이후 오오무라에서 체포된 키리스탄들은 603명에 달했는데 99명은 방면되고, 20명은 종신형을 받았으며, 7명은 조사 중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남은 406명에게는 참수형이 결정되었다. 참수형을 선고 받은 자는 나가사키에 108명, 사가에 37명, 히라토에 64명, 시마바라에 56명, 그리고 오오무라 스즈타로 감옥에 131명이 갇혔다.
스즈타로 감옥에 갇혔던 131명은 1658년 처형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도중에 처자를 비롯한 가족, 친척들과의 최후 이별이 허용되었던 곳에서 작별을 하게 되는데 그곳이 처자 이별의 바위이다. 처자 이별의 바위에서 가족들과 헤어진 순교자들은 오오무라 처형장에서 4열로 줄을 지어 앉은 채 목이 잘려 참수당했다<사진 4>.
131명의 순교자 중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와 일본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던 13명의 한국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의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 순교자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순교에 대해 기쁘게 생각했기에 한 번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오오무라 처형장에서 잘렸던 머리는 소금에 절여 스무날 동안 많은 사람 앞에서 전시되었다가 매장되었다. 몸과 머리를 따로 매장했는데 그 이유는 죽은 크리스천이 부활한다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지 못하도록 몸은 가까운 대나무밭에 묻었다가 3일 후에 오오무라만에 던져 버렸고, 머리만 따로 매장하였던 것이다<사진 5>.
한편, 1629년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64명의 키리스탄들이 운젠으로 끌려가 지옥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일본사람들은 운젠의 온천물이 부글부글 끓는 모습을 보고 지옥이 있다면 이곳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짧게는 10일, 길게는 한 달씩 옷을 모두 벗기고 나서 200도의 끓는 온천수를 몸에 뿌려 잔인한 고통을 가하다가 최후에는 온천물에 빠트려 죽였다<사진 6>.
또한 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받아 온 마츠코라 시게마사는 성을 건축하기 위해 계속된 가뭄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에게 또 다시 혹독한 세금을 부과하여 거둬들이려 했다. 이에 1637년 12월 12일 농민반란을 계기로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졌는데 농민들 대부분은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러자 영주는 이것을 빌미삼아 12만 5천8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3만 7천 명의 크리스천 농민들을 모두 잔인하게 학살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이다. 이때의 역사가 시마바라성 자료관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본 260년 순교의 역사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아직도 잔인한 핍박과 순교의 현장이 발굴되고 있고, 발굴된 순교의 현장을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당시 크리스천들은 사회에서 중한 범죄자로 간주되어 이들의 처벌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반기독교 정서는 약 260여 년간 일본사람들의 의식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말세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라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처럼 일본 땅에서 일어났던 순교의 역사 현장에 믿음을 가졌다가 배도하여 믿는 자들을 죽음에 내어줬던 자들도 분명 있었으리라. 말세를 당한 이때 믿는 자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배도자가 아닌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도 도래할지 모르는 잔인한 핍박의 현장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의 정신으로 주님 맞이할 수 있는 부활의 신앙을 갖는 것만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작품을 영혼의 때에 거둘 수 있으리라 믿기에 오늘도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6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