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라도
■ 규슈(九州) 북서쪽에 있는 섬. 후쿠오카 공항에서 버스로 3시간.
■ 자비에르 기념교회(사진). 기독교 박물관.
1550년 개항돼 일본 최초로 서구열강과 무역했다. 일본 최초의 선교사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자비에르가 1549년 도착해 기독교를 포교했으며, 1551년 일본 최초의 교회가 건립됐다.
2) 히라시 소노기
■ 나가사키 항 건너편 해변. 사세보에서 버스로 1시간.
■ 26인 순교자 승선지 기념비(사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서구열강을 견제하기 위해 묵과해오던 크리스천 포교에 대한 강경책을 행하며 1587년 크리스천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는 70여만 명의 크리스천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것이다. 1597년 1월 금교령을 어기고 드린 예배를 이유로 쿄토, 오사카에서 크리스천 24명을 체포해 한 쪽 귀를 자른 후 쿄토~나가사키까지 1000킬로의 죽음의 행진을 하게 했다.<지도1> 모진 고통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순교자의 모습에 감동받아 따라오던 2명이 순교대열에 합류해 모두 26명의 순교자가 2월 5일 세 척의 배에 나누어 오무라만 건너편의 토키츠 해변으로 나아가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26명이 순교했다.
3) 나가사키
■ 규슈 북서부 나가사키 현 최대의 도시. 히가시 소노기에서 버스로 45분.
■ 26인 순교자 기념관(사진). 석자감옥. 원폭 자료관. 평화 공원.
히라도에 이어 일본이 2번째로 외국과 무역을 개시. 자비에르가 전한 복음을 듣고 나가사키 현 내 오무라의 영주가 크리스천이 됐고 주민 6만여 명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쿄토에서 나가사키까지 순교자를 끌고 와서 죽인 것은 이들 6만 명의 주민에게 참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1597년 2월 5일 아침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 세워진 26개의 십자가를 보자 26인은 기쁨으로 달려가 자기가 달려 죽을 십자가를 끌어안았고 4천여 명이 보는 가운데 창으로 가슴을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시편을 외웠다고 전해진다. 가장 어린 12세 소년을 포함한 26인 순교자들의 유체는 그 후 80일간 십자가에 달린 채 방치됐다. 450년이 지나고 나가사키 언덕에는 26인의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졌다.
4) 오무라
■ 규슈 나가사키 현에 있는 도시. 하우스텐보에서 버스로 1시간.
■스즈타로 감옥(사진 좌). 처자이별바위(사진 우). 후쿠루바 처형장. 목무덤. 몸무덤.
1622년 9월 10일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 또 다시 순교의 피가 뿌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한 56명이 처형된 ‘원화 대순교’다.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 25명이 기둥에 묶인 채 장작불에 천천히 그을려 죽어가는 동안 선교사를 숨겨준 사람과 가족 31명이 목이 잘려 순교했다. 스피노라 선교사를 비롯한 크리스천들은 1618년 12월 15일부터 3년 9개월 동안 6평 남짓한 곳에 최고 33명까지 갇혔다가 처형됐다. 금교령이 발표된 이후 오무라에서 체포된 크리스천 중 406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그중 스즈타로 감옥에 갇혔던 131명은 1658년 호쿠바로 처형장으로 끌려간다. 도중에 처자를 비롯한 가족, 친척들과의 최후 이별이 허용되었던 곳에서 작별을 하게 되는데 그곳이 처자 이별의 바위다. 131명 중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13명의 한국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이때 오무라 처형장에서 잘렸던 머리는 소금에 절여 20일 동안 전시됐다가 매장되었다. 몸과 머리를 따로 매장했는데 그 이유는 죽은 크리스천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몸은 오무라만에 던져 버렸고, 머리만 따로 매장했다.
5) 시마바라
■ 나가사키 현 남동부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시이자 시마바라 반도의 중심 도시. 오무라에서 버스로 2시간.
■ 시미바라 자료관 (사진)
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된 마츠코라 시게마사는 성을 건축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혹독한 세금을 부과해 거둬들였다. 계속된 가뭄 때문에 피폐해진 농민들의 반발은 거세졌고, 결국 1637년 12월 12일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영주는 당시 대부분 크리스천이었던 농민을 12만 5천8백 명의 군사를 동원해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3만 7천 명의 크리스천 농민들을 모두 잔인하게 학살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인데, 이때의 역사가 시마바라 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6) 운젠
■ 규슈 나가사키 현 운젠 산 지역. 시마바라에서 버스로 50분.
■ 운젠지옥(사진).
1629년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64명의 기독교인들이 운젠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일본사람들은 운젠의 온천물이 부글부글 끓는 모습을 보고 지옥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곳을 운젠지옥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짧게는 10일, 길게는 한 달씩 200도의 끓는 온천수를 맨몸에 뿌려 잔인한 고통을 가하다가 최후에는 온천물에 빠트려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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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피 헛되지 않길(조성군 안수집사)
일본 땅에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왔으나 엄청난 핍박과 고통으로 순교의 피 뿌림이 일어났다. 1597년에 순교한 26인의 순교 현장에 서서 사도 바울과 같이 장차 다가올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숨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순교의 믿음에 대한 결단과 각오를 새롭게 해본다. 일본 땅의 복음화는 0.3%에 불과하다. 이제 일본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어 순교자 26인의 피 흘림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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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주님의 나라(이은경 집사)
순교지로 가는 차 안에서 어느 목사님께서 ‘이제는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고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셨다. 순간 ‘왜 우리가 일본을 용서해야 하나, 어떻게 일본을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너무도 큰 상처를 줬는데.... 26인 순교자 기념관에 도착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감사하는 그들의 모습. 주님을 배도하지 않고 끝까지 순교의 믿음을 지킨 그들의 모습에 울컥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나는 얼마나 편안하고 나태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나. 그들의 모습 앞에 눈물로 기도했다. “일본이 기독교인들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인 현장 앞에, 우리나라를 수백 년 간 잔인하게 짓밟은 역사 앞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 하나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수많은 순교자의 피 흘린 현장 속에서 주님께서 일본을 얼마나 사랑하셨고, 지금도 그 영혼들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일본도 주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일본도 하나님께서 만든 작품인데 어찌 우리가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겠는가. 미워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뿌리는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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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로서 삶 기도(김승규 집사)
일본 순교지들은 여느 기독교 성지처럼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고, 곳에 따라서는 안내판만 있는 곳도 있었다. 어찌 보면 현재 일본 기독교의 현주소 같았다. 우리나라보다 수백 년 일찍 복음이 들어왔고 포교 50년만에 기독교인이 70만에 달했으나 지금은 인구의 0.3%도 안 되는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과거 일본 순교자들의 면면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숙연해진다. 한쪽 귀가 잘린 채 처형지로 끌려가는 한 달간의 여정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로 주님의 가신 고난의 길을 갔던 순교자들. 오늘날 신앙의 자유 속에서 오히려 복음이 위축돼 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신앙을 반성하게 된다. 순교자의 믿음은 아니더라도, 신앙양심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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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살아계심 실감(이치복 성도)
일본 순교지를 돌아보며 당시 일본정부 차원에서 크리스천을 탄압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순교당했는지 생생히 기록이 남아 있는 나가사키 순교 유적지를 보고 나니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절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스즈타로 감옥에서 순교자들은 6평밖에 안 되는 방에서 최고 33인이 수용당하다 결국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아들 예수를 죽게 하신 분이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자유의 나라다. 어찌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믿는 자는 만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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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믿음 가지길(김분석 집사)
어느 곳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었지만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눈물짓게 한 곳은 바로 ‘26인 순교자 승선 유적지’였다. 이들의 죽음을 보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니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고 나는 언제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고 순교의 믿음을 가질까 눈물이 났다. 순교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야 할 수 있듯, 이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리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발견되는 믿음 있는 삶이 되길, 또한 독생자의 피 흘림이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을 위해 후회 없이 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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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끈 튼튼해지길(임지영 자매)
윤석전 목사님께서 일본의 순교역사에 대해 말씀하실 때 깜짝 놀랐다. 귀신 숭배가 많다던 일본에 순교자가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엄청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기쁘게 죽음을 택했다는 순교자들의 믿음에 더 놀랐다. 그들을 더욱 알고 싶어 여행에 참가했다. 가장 감동 깊은 곳은 산 속에 펄펄 끓고 있는 유황 온천, 섭씨 200도에 달하는 온천물을 나무바가지에 떠서 벌거벗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얹고 또 물에 담갔다가 빼기를 일주일에서 한 달가량 했다는 그곳은 ‘지옥천’이라 불린다. 죽기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기쁨으로 순교했던 그들은 고통 속에 찬양하며 주님을 붙잡았다. 하나님과 그들을 일대일로 이어주는 질기고도 아름다운 믿음의 끈이 참 부러웠다. 순교의 땅을 밟으며 나와 하나님의 끈을 생각했다. 그 끈이 더 튼튼해지길, 변치 않길 기도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7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