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등록날짜 [ 2024-02-02 10:10:27 ]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믿음이 없는 이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애타게 탄식하셔

응답 받을 믿음으로 기도해야


마가복음 강해(24)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꿇어 엎드려 자기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 달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서도 믿음을 찾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9:22). 이 아버지의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은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믿음의 고백(막1:40)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관심이 없고 그저 예수님의 병 고치는 이적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믿음이 없는데도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것도 속상한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니까 예수께서 애타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우리는 하나님을 약속 없는 이방 신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고 약속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불쌍한 사정을 아시고 죄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붙잡고 회개하면,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죄 사함의 약속입니다(렘31:31~34).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졌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약속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을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고, 죽고, 부활하심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성령께서 직접 보증하신 약속이요, 2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여 죄 사함받는 증거가 이루어졌고, 또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고 있으니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에 아이의 아버지가 다급히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없는 것도 도와주십니다.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믿음을 다잡고,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깨닫고,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때에 어떤 결과가 있는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이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막9:25). 그 권세 있는 말씀 앞에 귀신이 소리 지르고 나가자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며 죽은 것같이 되었고, 예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섭니다.


이에 놀란 제자들이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막9:29). 무조건 기도한다고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예수께서 마귀를 멸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내 정욕대로 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대로 깨닫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있는 복,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이 확실한 복, 천국이 확실한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참 성도

예수께서 변화산이 있던 지역을 떠나 갈릴리를 지나가실 때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가려고 하십니다(막9:30). 갈릴리 지방은 예수께서 공생애 대부분을 사역하신 곳인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지나가려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목적지가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미 구석구석 전도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신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뜻이자 당신의 사명인 십자가 대속 사역을 완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은밀하고 신속하게 지나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선교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선교의 최종 목표는 갈릴리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니요, ‘땅 끝’이었습니다(마28:19).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면 먼저 십자가의 대속을 완수해야 했고, 그 십자가 대속 진리를 남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셔야 했던 것입니다(막9:3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 직후에 하셨습니다(막8:27~33).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이후에 다시금 수난 예고를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인류를 위해 대속 죽음을 당할 고난받는 종임을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지도 못하고 그냥 무서워만 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관심한 까닭이요, 두려워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정치적 영예를 얻으려는 소망이 깨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려고 했습니다(막8:31~33).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 고난까지 참예할 수 있는 성도들을 원하십니다. 주님을 환호하고 그분께 무엇인가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허다하나, 정작 주를 위해 의의 고난과 핍박을 당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뿐 아니라 그분의 고난까지 ‘내 것’으로 만들려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8:17)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고난에 참예하지 못하고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그 고난에도 동참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3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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