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비록 올 가을은 잦은 비와 폭풍까지 겹쳐 그 수확이 예년 같지 않더라도 수확의 계절임에는 분명하다. 추석 명절 바로 전 주에 우리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지내면서 하나님께 마음껏 감사하였다. 영혼의 때를 위해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추수’는 진정 무엇인가? 또한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성경에 한 부자가 곳간을 새로 짓고 그곳에 한 해 동안 먹을 충분한 양식을 쌓아놓고 ‘내 영혼아 편히 쉬자’고 할 때 예수께서는 ‘과연 오늘 밤 네 목숨을 가져가면 이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면서 우리의 추수의 대상이 이 땅에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지적하셨다.
성경은 또다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추수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 땅의 수많은 영혼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그 살과 피가 바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양식이요, 우리가 추수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며 주신 이 땅의 자원은 지금까지 인류가 먹고 마셔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하물며 독생자를 내어놓고 주신 영혼의 양식의 풍성함은 과연 이 땅의 자원에 비할 수 있을까? 누구든지 믿는 자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풍성하게 추수거리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하지만 천국을 ‘오가는 사람이 드문 한적한 좁은 문’(마7:13)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기회는 많되 그것을 추수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자들은 항상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것 같으나 실상은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하고 곤고하다고 경고한 것처럼 이 땅의 많은 교회들 역시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생명 되어 심령을 움직이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지면서 행함이 수반되는 견고한 믿음은 찾기 어렵고 금새 무너져 버릴 듯한 이론만이 난무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우리의 소유로 주셨고 그것을 마음껏 추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것이 내 것이라고 말만 한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요,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감하게 팔을 걷어붙이고 추수를 위해 뛰어들어야한다. 낫을 들어 벼를 베고 꽁꽁 볏단으로 묶어 내 창고에 넣을 때까지는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추수의 기회를 우리는 야무지게 진정한 우리의 결실로 만들어 내는 수고가 필요하다.
이제 추수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경고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지런히 땀을 흘려도 시간이 모자랄 때가 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 속에서, 충성의 시간 속에서, 전도 속에서, 영혼 사랑을 위한 수고 속에서 추수의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그 기쁨의 절정으로 살아보자.
위 글은 교회신문 <5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