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차원의 이해 속에서 교회를 인격 수양의 장소 정도로 생각한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역시 도덕적, 윤리적 수준의 죄를 들어가며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 하십시오”라고 하면 예수는 그저 사대성인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박애주의 사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다른 곳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 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을 들어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을 청하고, 종을 보내어 초청받은 자들에게 오라고 하였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사양하게 된다. 종이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은 다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자리는 남게 되고 주인은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 인한 것도 아니고 특정한 대상에게만 주어진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러야할 피할 수 없는 고난이었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만이 굳게 닫혔던 천국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 되었을 때 이미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그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놓으시며 그 사랑을 완성하셨다. 이때부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천국 잔치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의인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죄인된 우리가 그 초청 대상자이며 그 초청에 응하는 자만이 참석할 수 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은 계속된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면 강권해서라도 그 자리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 하신다. 그 초청을 거절하는 자도 있고 그 초청에 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 신령한 행복을 누리는 자도 있을 것이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강퍅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나를 죽기까지 사랑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며, 보잘것없는 나를 위한 그 사랑의 주체가 천지를 지으시고 모든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 역시 또 한번 충격이다. 당신이 바로 이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강권하여 부르시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지 않은가?
“예수 믿으세요”라는 이 한 마디는 하나님이 배설한 천국의 잔치에 당신을 초청하는 소리이며 당신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이다. 이 사랑의 목소리 앞에 충격을 받고 만사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참석하여 풍성한 사랑의 잔치를 마음껏 즐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