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나무는 울긋불긋한 빛깔로 세상을 온통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며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이 가을을 아름답게 한다 한들 예수님께서 달리신 갈보리 언덕의 초라한 나무 십자가에 비할 수 있을까.
십자가는 참수형, 화형보다 더 가혹한 사형의 방법으로 가장 천하고 극악한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 형은 원래 전투에서 패한 자들을 전시하는 한 방법으로, 승리자들이 포로로 잡힌 자들을 장대나 말뚝에 꿰찌르는 형에 처함으로서 전쟁의 승리를 드러내려 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경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말뚝이나 나무를 의미한다. 십자가 형틀은 보통 세로 나무와 가로 나무로 구분되는데, 보통 세로 나무는 미리 처형될 곳에 세워져 있고, 가로 나무만 형벌을 받는 죄수가 직접 운반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사형언도를 받으셨다. 채찍은 그 끝에 두 개의 둥그런 납덩어리가 달려 있는 무거운 가죽으로 되어 있어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이 찢겨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조롱의 상징물인 가시 면류관이 예수님에게 씌워졌고, 50킬로그램이 넘는 거친 나무기둥을 어깨에 짊어지고 형장을 향해 약 600여 미터나 되는 골고다의 거친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셔야 했다. 그 후 그분의 손과 발목에는 15센티미터 이상의 묵직하고 네모진 단철 못이 박혀졌고, 준비된 직각의 기둥에 높이 매어 달린다. 손목에 박혀 있는 못이 몸무게를 지탱할 때마다 상상 못 할 고통은 엄습해오고 그분의 피는 거친 나무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수직의 나무와 가로 기둥이 만나는 지점에서 예수의 심장은 고동치고 있지만 숨을 쉴 때마다 죽음의 순간은 가까워진다. 십자가 처형은 사람을 고통속에서 탈진시켜 잔인하게 죽이는 형벌이다. 결국 예수는 6시간 만에 ‘다 이루었다’ 라는 최후의 말씀을 남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과연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는 그분의 형틀이 아니라 우리 죄의 형틀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죄를 주관하는 흑암의 세력들의 불법을 드러내시고 영적인 승리를 이루셨다. 그때부터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죄에서 자유를 선포하는 승리의 표가 되었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달린 나의 죄를 바라보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만나보지 못한 자들이여! 붉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가? 당신의 영혼을 붉게 채색시키는 예수의 피의 절정을 만나보라.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는가? 당신의 죄와 죽음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상징으로서 우뚝 선 예수의 나무 십자가를 바라보라.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비참한 자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한 절망 속에서 허무한 자이리라. 예수를 만나보라. 이 가을의 낙엽이 지기 전에, 가을을 거치는 인생이 다 가기 전에…
위 글은 교회신문 <5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