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한 생애 동안 자신이 쓰시던 어떤 것도 남겨 놓지 않으셨다. 그가 목수의 집에서 쓰시던 톱, 망치는 물론이고 무덤 속에서 입었던 수의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심령 안에 거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셨던 바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해 기념적 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은 상업주의의 극치를 이루며 타락과 광란의 현장으로 변하고 있다. 오늘날 무슨 이유로 사람들이 예수의 성탄 앞에서 그토록 타락의 극치에서 향락의 파멸을 기뻐하는 것일까?
그 시대에 사실 예수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 만한 어떤 이유도 없을 것이다. 말구유에서의 탄생도 초라했고, 그분의 짧은 공생애의 삶도 세상의 정욕의 사람들이 볼 때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 역시 가장 저주스러운 죄인만을 처형하는 십자가의 형틀에서 죄인 중의 죄인 괴수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니 그분의 삶과 죽음 모두가 비참하고 초라한 것뿐이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십자가까지 어느 것 하나도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이사야 53장 2-3)”라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삶 전체가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를 예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이 인류의 영원한 문제인 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여정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고난의 길의 착수임을 세상 사람들의 지식으로는 알 리가 없었다.
세상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정욕의 욕구 충족 안에서 그저 기뻐하나 우리는 성탄하신 예수님이 담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가장 가치 있는 최고의 생명의 사건으로 소유하고 있다.
살점을 뜯어내는 모진 채찍 소리와 걷잡을 수 없이 퍼부어지는 온갖 조롱과 멸시와 야유는 나의 질병과 저주를 몰아낼 절대 권세자 그분의 사랑의 무언의 함성이셨다. 인류의 죄 값이라고 하는 십자가의 죽음의 짐을 짊어지시고 고난에 얼룩진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토해내는 신음소리는 인류 앞에 내뱉는 생명의 대함성이셨다. “다 이루었다”라는 그토록 인류가 기다렸던 그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의 관심은 온통 십자가 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의 최고의 기쁨의 절정이 성탄의 기쁨이 되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생명이 없다고 하는 뜨거운 고백을 가슴에 가득 담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예수가 사라져가는 성탄절 속에서 예수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십자가의 구속의 체험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은 향락과 쾌락과 정욕의 욕구 충족과 육신의 소욕의 열망이라고 하는 무덤 속에 성탄을 묻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탄으로 이루어진 치료와 축복과 속죄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의 절정의 횃불을 높이 들고 성탄을 몰라 멸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탄의 생명의 함성을 질러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