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씨뿌림에 비유한 것은 한 알의 작은 씨가 두터운 흙의 두께를 뚫고 전혀 다른 모양으로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부활의 신비함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이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간 그 깊이의 반대 방향으로 솟아오르는 생명력이 부활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보좌를 버리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겸손의 분량만큼이 부활의 큰 원동력이다. 부활은 우리들에게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알리는 희소식이며 피조물인 존재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신분까지 격상시킨 대변혁의 사건이다.
부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 하시면서 그 성령으로 내가 왜 죽었으며 어떻게 부활하였는가를 증거하기 위한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는 순간 예수를 오해하여 죽인 사람들 앞에 담대히 나아가 성령의 권능으로, 따르는 이적과 표적으로 예수의 인류구원의 사건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였고 이 복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통하여 엄청난 영적 진동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재림과 함께 그 부활에 참예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므로 부활의 위력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가장 큰 차이점은 내일이라는 ‘희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반드시 끝이 있는 유한한 육신의 때조차 희망이라는 힘으로 오늘을 버텨낼 수 있다면, 영원한 부활의 축복으로 주신 천국을 향한 소망의 힘의 위력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것이다.
실제적인 사건으로 다가오게 될 영혼의 때의 부유를 바라는 소망,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며, 그 속에서 지금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최고의 신령한 밑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지만 그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또한 이 땅의 시간에 속해 있으나 동시에 천국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창세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사랑의 스케쥴은 오늘도 그 생명력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속에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 이 거대한 사랑의 드라마는 부활의 소망이 아름다운 만남의 현실로 이루어지면서 아무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 능력으로 영원히 진행 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5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