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유를 사랑한다. 어떠한 속박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대의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인간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자가 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가난으로부터 자유, 문제로부터의 자유를 원한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런 요구에 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자유는 외면해 버릴 때가 많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자유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속박하는 부자유로 생각하며 부담을 느낀다. 심지어 자신의 부자유를 어떻게 해서든지 합리화시키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시대적인 상황을 들추어내고, 역사를 들추어내면서 갖은 방법으로 정면돌파를 피해간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 있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자유를 느껴야 한다.
스데반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길거리에서 돌에 맞아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 육체로는 최고의 부자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 뒤에는 예수님께서 그를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자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다. 죽음이라는 최악의 육체의 부자유 상태가 올지라도 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한 자유를 선택하는 믿음을 간직하고 싶다.
기독교인의 삶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순교의 현장을 많이 맞이하게 된다. 비록 육체의 죽음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영적 싸움은 처절하다.
나는 이 싸움 속에서 지쳐 있을 때마다 머리 둘 곳 없는 세상에서 홀로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시던 예수님의 고독한 모습을 떠올린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체를 입고 살아갔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겟세마네의 절규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실 수 없습니까? ......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결국 주님께서도 육체의 자유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자유를 선택하셨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위 글은 교회신문 <1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