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다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다. 부흥회를 위해 지방에 내려갔을 때 교회에서 마련해준 숙소가 가정집인 경우가 가끔 있었다. 숙소를 마련해준 사람은 내 집처럼 마음 푹 놓고 편히 쉬라고 하지만 일단 내 집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불편하기 마련이다.
강사를 대접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였지만 아무리 편안하게 있으려고 해도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다. 부흥성회를 위해 밤늦게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의 강대상이 나의 가장 편안한 숙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로 거듭난 우리를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으로 삼으셨으니 우리는 항상 그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항상 내 안에서 불편하지는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편안하게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령께서는 남의 집에 거하는 것처럼 불편해 하시지는 않는지에 대해 항상 나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성령의 사람은 그분이 항상 내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시고 있는지 노심초사 살피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감독자로 목회자를 세우셨으니 목회자는 더욱 성령의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의 전권을 성령께 위임하고 그분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공적인 목회의 비결은 성령이 제한 없이 목회자를 통해 자유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런 순종의 결과가 곧 능력으로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가 성령께 불순종하는 자가 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항상 그분의 자유를 위하여 성령을 거스르는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순종의 삶이 곧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의 삶이며 ‘나’로 사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주를 위해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느끼는 자가 바로 목회자이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하신가? 나는 성령의 요구에 자유한가? 항상 노심초사 하는 나는 분명 그분의 무익한 종이다. 성령이여! 내 안에서 자유하소서. 성령으로 목회하게 하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6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