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흰돌산 수양관의 문화선교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순교’다. 손양원 목사에 이어 올해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의 삶이 소개되면서 모든 사람이 충격적인 은혜를 경험하였다. 감성적이고 다양한 주제를 선호하는 지금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교’라는 주제가 이렇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적인 여유와 풍요로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우리들의 신앙의 야성(野性)과 신앙의 긴장감을 순교자의 삶을 통해 다시금 끄집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로 그 절정을 이룬다. 우선 예수님의 12제자가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X형으로 된 형틀에서 못 박혀 죽었다. 큰 야고보는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끓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당했다가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기둥에 매인 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굽에서 칼에, 다대오는 페르시아에서 활에 맞아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 박혀 죽었다. 사도 바울 역시 처참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이후로 무수한 순교자가 복음전도의 이유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순교의 피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교회의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부흥 역시 36년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전후한 공산치하에 수많은 순교의 피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12제자의 순교의 장면들을 강단에 써 붙여놓고 항상 나를 강하게 단련한다. 그 동안의 목회 여정 속에서 겪었던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바로 순교자들의 삶이었다.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그를 영접하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위로를 느낄 수 있었으며, 강단 위에서 외치던 열정적인 설교 역시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각오 때문이었다.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순교의 수준이다. 순교의 정신이 사라지는 순간 기독교의 생명력 역시 사라진다.
성도여! 순교의 정신으로 복음을 향한 열정을 다시한번 불태우자.
위 글은 교회신문 <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