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길’과 같다. 길은 눈에 보이는 방향이 있고 목적지가 있지만 시간이라는 길은 눈으로 볼 수 없어 방향을 잡기도 어렵고 목적지를 찾기도 어렵다.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다. 요즘 큰 교회 목사라는 이유로 나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심지어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큰 교회 목사니 등따숩고 배부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걷고 있는 길이 협착해 보이지도 않고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다는 얘기다. 그게 아닌데 하고 부인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내가 걷고 있는 길의 주위를 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주님 가신 길을 생각해본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 허리에는 굵은 창자욱, 어깨에는 무거운 십자가. 조롱의 소리, 멸시와 천대의 소리.... 이보다 더 협착한 길이 또 있을까? 이 길에 비하면 나의 길은 너무 편안하다.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주님 앞에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내가 걷던 길을 돌이켜 주님이 가신 그 길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로부터 자유함으로 평안하지만 주님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로서는 절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라 하면 기도할 수 있고, 전도하라 하면 전도할 수 있고, 사랑하라 하면 사랑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하라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말씀 앞에 목숨을 내 놓으라면 내놓을 수 있는, 바람이 불면 그 방향대로 움직이는 갈대와 같이 주님 앞에 전천후의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살기에 너무나 완악한 나의 육신 때문에 항상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앞으로도 내가 걷는 길을 부러운 듯 바라본다면 난 더 고개를 숙이고 나를 낮출 것이고, 내가 걷는 길에 편안함을 느낀다면 나는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주님의 고난에 나를 동참시켜 달라고 몸부림 치리라.
한 해가 지나감이 아쉽다.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육신이 기다려 주지 않는 때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더 아쉽다. 천국을 향한 황금길. 그 길이 내 눈앞에 활짝 펼쳐지는 그날이 오기까지 난 좁고 협착한 길을 걸으리라. 더 좁은 문으로 들어가리라. 주님 가신 길이여! 핏빛 눈물 자욱 뒤범벅 된 고난의 길이여! 주여, 나도 그 길을 끝까지 힘차게 걷게 하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7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