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어서 행복하던 가정이 불행해졌다”며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동안 그 가정을 이끌어 가던 주인이 예수로 바뀌는 것이 두려워 소동을 벌이는 것이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가 무슨 힘이 있었는가? 그런데도 온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 전체가 소동을 벌였다. 그 이후로도 예수는 민중을 소란하게 하거나 폭동을 주동한 사실이 없는데도 왜 그렇게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예수가 있는 곳에서는 불의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가 예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5:7)라며 소동을 벌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영적 싸움의 소동 앞에 담대해야 한다.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위 글은 교회신문 <12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