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한계를 스스로 긋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스데반처럼 순교에 이르기까지 신앙생활 하리라고 마음먹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신이 임의로 정한 신앙의 한계선을 고정해 놓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한계선을 넘어서면 당장 육신에 무리가 오고, 환경에 무리가 오기 때문이다. 성령이 쓰시는 사람은 ‘내가 이 정도까지만 믿으리라! 이만큼만 소화한다! 나는 그 이상은 초월할 수 없다’라는 신앙의 한계선을 과감히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부담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선을 그어놓고는 이 정도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은 성령의 소욕을 제한하려는 철없는 육신의 요구일 뿐이다. 성령은 절대 그 선 안에서 제한당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항상 나의 한계선 이상을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내 육신의 한계 상황밖에 보지 못하는 좁은 나를 그분 수준의 스케일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쓰시려는 것이다. 성령을 제한하지 않으면 지금도 사도행전 때와 동일한 이적과 표적의 역사가 성령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때 역사하시는 성령이 지금도 여전히 믿는 자의 권세로 그 입에서 예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능력이 나타나고, 기도할 때 응답이 오고 귀신이 떠나가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나를 제한 없이 초월할 수 있는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이 위대한 축복이요, 위대한 기업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