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5-20 10:58:30 ]
목회를 늦게 시작했으므로 시간을 단축해 보려고, 교회를 개척할 당시부터 남들 잘 때 밤잠 자지 않고 기도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 그릇을 어떻게든 키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더 부흥하기를 원했고,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큰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보내 주시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릇은 영혼을 품을 수 있는 함량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그 한계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그릇이었다. 예수는 자기를 욕하고 때리고 죽이는 사람마저 제한하지 않고 품으셨다.
첫 순교자인 스데반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동족을 바라보며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라며 모두를 품었다. 그에게 인류를 품을 만한 예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은 또 얼마나 큰 그릇이었는가? 주님께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행9:15)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자기 분량을 주님 닮기까지 키워 나가야 한다. 아울러 기도로 큰 응답을 소유하기 원한다면 열심히 기도하여 자기 그릇을 제한 없이 키워 나가야 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대로 “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정도가 되려면 그릇이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이유는 그만큼 큰 그릇으로 자신을 만들라는 말이다.
아무리 웅장하고 멋진 것을 기도했어도 우리가 응답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받을 수 있다. 응답이 없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응답을 수용할 만큼 자신이 큰 그릇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응답받을 수준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한다.
주여! 내 그릇을 깨끗하게 하시고 크게 하소서!
/윤석전 목사
위 글은 교회신문 <38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