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일념] 고통에도 한결같은 신부의 예수 사랑

등록날짜 [ 2021-02-23 19:59:01 ]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와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인간이 생활하는 데 모든 것이 열악한 광야 생활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 있습니까? 도대체 왜 우리를 이런 고통 속에 몰아넣으십니까?”라고 수없이 원망하며 하나님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나오는 말세에 닥칠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고통이나 평소 우리가 말하는 고통의 강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어는 ‘칼레포이(calepoi)’로 ‘광포한’, ‘사나운’이라는 뜻입니다. 광포하고 사납다는 이 단어는 마태복음 8장에서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표현할 때도 쓰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사납고 광포한지, 자신을 결박한 쇠사슬을 힘으로 끊어 버릴 만큼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말세에 당하는 고통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납고 광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절망스러운 고통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고통의 때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 들림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로서 자격을 갖춰 주님을 만나려면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한다면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을 신부로 삼지 않으십니다. 속으로는 세상을 흠모하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주님을 절대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겉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으로 신랑을 사랑하는 자, 곧 신부를 데리러 신랑되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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