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불편한(?) 진리

등록날짜 [ 2010-04-19 08:20:32 ]

기독교는 어차피 세상과는 타협할 수 없는 종교
대중의 인기 편승하기보다 정확한 복음 전해줘야

상상 속의 예수 얼굴
미국의 어느 방송에서 예수님의 복원된 얼굴을 공개하였다.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는 데 사용됐다고 전해진 수의(壽衣)에 남아 있는 먼지, 피와 물 자국 등으로부터 예수님의 생김새를 추정해 이를 3D 이미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 수의가 예수님의 것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흥미 있는 것은 공개된 예수님의 얼굴이 지금껏 많은 사람이 상상해온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영국에서도 신약시대 유대인의 두개골을 근거로 예수의 얼굴을 복원한 것이 공개되었는데 그때도 성화(聖畵) 속의 예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예수의 외모에 대해 성경은 흠모할 것이 전혀 없다(사53:2)고 했으니 우리가 아는 예수의 얼굴은 허상일 뿐이다.

예수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면 그 상상이 더 지나치다. 외모는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항상 근엄하게 일정한 톤을 유지하니 리얼리티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그러니 재미가 없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그나마 감동적이었던 것은 리얼리티를 잘 살렸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의 공생애의 다른 사건들도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려낸다면 어떨까? 성전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퍼붓는 모습,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있는 예수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된다면 얼마나 다이나믹할까?

대중이 원하는 이상적인 종교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예수를 성경의 기록과는 다르게 그렸을까? 저주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출신성분으로 보나 무엇을 봐도 종교 지도자로 내세울 것이라곤 전혀 없기에 그랬을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가장 친근감을 줄 수 있는 모습으로 예수를 과대 포장한 것일까? 그 이유야 어찌됐든 문제는 예수를 잘못 그린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자체도 시대에 따라 변질되었다. 예수를 박애주의 실천자로, 정치적 지도자로, 혹은 사대성인의 한 사람으로 평생 오해해서 그가 ‘나’의 죄를 담당한 구세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상이란 것이 무엇인가? 나 스스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최근 타 종교 지도자의 죽음과 함께 ‘무소유’라는 단어가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지도자로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기에 그랬겠지만 한편으로 보면 사람들이 가지는 종교적인 이상과 기대에 너무나 잘 맞는 요소를 갖추었기에 그의 죽음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듯한 청빈한 삶,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고상함과 인품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종교인으로서는 너무나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에도 과연 그런 매력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선뜻 답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일도 아니다. 솔직히 기독교는 이 세상 사람들을 당장 매혹시킬 만한 요소가 원래부터 없다.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와 기독교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 몇 가지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신본주의지만 타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종교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비기독교인들에게 교회란 마치 산속에 있는 사찰처럼 세상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가끔 생각나면 찾아가는 정도면 딱 적당하다. 교회는 그저 이 세상에서 조용히 있으면서 이 땅의 어두운 곳을 살펴주는 사회봉사의 역할만 하길 바란다.

그런데 실상 교회는 어떠한가? 전혀 잠잠하지 않다. 조용하지도 않고 세상과 떨어져 있지도 않다. 일반인들은 교회가 너무 크다고 아우성이고 너무 많다고 불평이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상상하는 종교와 기독교는 너무 다르다. 교회를 알면 알수록 그들의 종교적 상상은 깨어질 뿐이다. 그 무엇보다 세상이 교회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는 전도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이다 못해 진돗개처럼 한 번 물면 놓지 않고, 고구마가 익었는지 찔러보듯 수시로 예수 믿으라고 권면하니 타 종교에 대한 배려나 화합을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무례한 일이다. 여하튼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란 가까이하기엔 너무 불편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예수의 얼굴을 바꿔 그린 것처럼 이 시대에 교회가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바꾼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주님께서는 이 불편한 관계에 전혀 개의치 말고 세상을 향해 뛰어들어 땅끝까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우회작전이 아닌 진검승부로 정면돌파를 명령하신 것이다. 그 방법만이 세상에 의해 일그러지고 깨진 예수의 형상을 온전케 복원시키는 길이요, 불편한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8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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