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5-24 09:04:10 ]
세계 곳곳의 위기 보며 인간의 ‘나약함’ 실감
마지막 때, 주님만 따라가는 ‘목적’ 분명해야
지난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 출장을 갔다가 귀국을 앞둔 상태에서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폭발해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었다. 화산재 구름이 확산되어 유럽 지역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유럽 대도시의 공항이 마비되자 기차역은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기차표는 매진되어 구할 수조차 없었다. 어디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지 난감했다. 프랑스의 칼라리스라는 도시에서 영국으로 해저 터널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곳을 왕복하는 모든 차량도 표가 동나고, 배를 이용해 보려고 여행 가방을 늘어놓고 길에 널브러져 종일 배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친절하게 안내해주었지만, 그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잘못된 정보를 주어 몇 시간을 줄을 잘못 서기도 했다. 밀라노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 역에도 안내원은 찾아볼 수도 없고, 웅성거리고 수군대는 사람들만이 몰려다닐 뿐이었다.
그 훌륭한 시설을 갖춘 대도시 역도,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첨단 컴퓨터 시스템이 갖춰졌다 해도 인간은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실감했다. 나는 언제 공항이 열릴지 예측할 수 없는 일주일을 보내고서야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 그 혼란의 일주일은 환란의 때에 방향을 몰라 이리저리 몰려가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그때 어떻게 우리의 본향을 찾아갈 것인가.
세계 곳곳에 속출하는 재앙의 현실
아이슬란드의 화산은 5월 초에 다시 폭발하여 또 한 번 유럽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의 금융위기, 이미 1500만 리터 이상의 원유가 유출되고도 아직 분출구를 막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멕시코만의 거대한 기름띠 등, 세계적 규모의 재앙들은 우리에게 예측하고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몰려온다.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정말 생생하게 그 긴박감과 그들의 눈물을 전해주지만, 대중이 잠시 공감한다는 것이 무슨 위로가 된단 말인가. 내가 살 길은 내가 찾아야 할 뿐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없이는 방향을 알 수 없듯이 주님의 인도 없이는 한 걸음도 안전하게 내디딜 수가 없음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에는 아우토반(Autobahn)이라고 하여 무한질주 구간이 있다. 차가 안락하게 질주하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여 시속 100km이든, 200km이든 요동 없이 달린다. 그러나 목적지는 제대로 정했는지, 그 목적지로 가는 방향은 정확한지 확신이 있어야 그런 안락함도 즐길 수가 있는 것 아닌가.
어리석고 나약한 우리는 풍요와 안락을 제공하는 차를 타고, 아무런 요동 없이 고속으로 달리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생각과 차원이 다르다.
세계적인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는 급성장을 했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2년 전, 적자운영을 하게 되었고, 즉시 그들은 7100개의 직영매장의 문을 닫고, 13만 명의 직원에게 더욱 전문적인 바리스타 교육을 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 것이다. 곧 매출이 오르고 회사가 회복되었다. 셔터를 내리고 처음에서 다시 시작하였던 그 고난의 시기는 결국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 방향을 잃고 질주하는 차를 세운다는 것이 축복이며, 다시 정확한 ‘방향’을 찾았기에 축복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좀 더 깨끗해지고, 좀 더 거룩해져서 주님이 준비하신 모든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눈 가리고 귀 가려서 사망이라고 써 붙인 차를 축복이라고 믿고 올라타는 어리석음, 그리고 속고 있으면서도 속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는 교만을 움켜쥐고,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주님만 따라가는 올바른 방향성
도넛 대신 모닝커피를 광고하여 사람들을 유인하는 어느 도넛 회사의 판매 전략처럼, 현대 교회는 예수의 피, 예수의 이름 대신 듣기에 흡족한 축복의 말들로 성도들의 취향을 맞추고 있다. 요동 없는 안락한 삶을 소망하기 이전에 예수의 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생명, 새 삶을 살고, 생명의 빛을 따라 가기를 소망해야 한다.
방향을 정확히 안다 해도 악한 영들은 우리를 방해한다. 고급차를 타고 세계적인 수준의 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린다 해도, 악한 영들은 고속도로의 안내표지판을 가려서 글씨가 보이지 않게도 하며. 앞차가 고장 나서 멈추게도 하며, 옆 차가 불쑥 끼어들게도 한다. 200킬로가 넘는 속도에서 급작스럽게 속도를 줄인다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의 풍요와 안락은 어떻게 보장될 것인가. 악한 영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성령 충만밖에는 길이 없다.
우리에게 유럽 공항 위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는 이 때에, 주님만 따라가는 올바른 ‘방향성’만 지니고 있다면 두려울 것이 그 무엇이랴.
위 글은 교회신문 <19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