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1-02 08:24:16 ]
국가는 군사력이 아닌 애국심으로 지키는 것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물러가면서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민주주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월남, 越南), 이북에는 공산주의 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 越盟)이 수립된다. 이후 월남과 월맹은 십여 년에 걸쳐 크고 작은 전쟁을 하게 되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연간 500억 달러에 가까운 많은 예산과 53만 명이 넘는 군대를 파병하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5년여 협상 끝에 1973년 휴전을 한다.
월맹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은 베트남전에 투입한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월남 군사력은 물량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주도한 미국의 키신저는 1974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러나 월맹이 평화협상에 나선 것은 미군의 수많은 폭격과 경제 봉쇄로 피폐해진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것으로 베트남의 공산화 전략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외적인 전술만 바꾼 것이었다. 월맹이 1950년대 중반에 수립한 기본전략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 정권을 월남에 수립하고, 무력으로 월남을 해방(공산화)해 적화통일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남한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북한이 유지하고 있는 전략과 같다.
휴전이 이루어질 당시 월맹은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식량과 물자 부족을 겪고 있었지만, 월맹은 끊임없이 월남에 대해 무력도발을 이어갔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부터 월남에는 수많은 공산당 추종세력이 퍼져 있었다. 실제로 월남 패망 당시에 전체 인구의 0.5% 정도인 4만여 명이 공산당 추종세력인 것으로 나타났다. 증언에 의하면, 월남정부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면 월맹 측에 상세하게 보고되고 유력한 대선 후보와 정치인, 관료들이 월남 패망 후 간첩으로 알려질 정도로 사회 곳곳에 공산주의 추종자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휴전협정 당시 월남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월맹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고, 월남 국민은 낙관론과 안보 불감증에 빠져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모든 국민이 평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무시를 당했다. 1975년 9월, 월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수많은 정쟁과 갈등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이를 부추기면서 국민의 사기와 도덕을 추락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월맹 추종자인 공산주의 세력이 사회 전반에 침투해 갔다. 이러한 부정부패는 사회를 거쳐 군대 내에도 퍼져 나갔다. 월남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하자마자 뇌물을 써서 선진국 유학을 떠나 버렸다. 병역기피를 자랑처럼 여기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군인들은 적과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휴전으로 말미암아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자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공산군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점차 식어갔다. 월남 시민사회단체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으나, 이 조직에 공산당 추종세력이 파고들면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바뀌며 수많은 시민단체가 언론사를 만들어 국민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없애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때마침 발견된 유전(油田)으로 국민은 전쟁이라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경제발전만으로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속에 빠져 갔다.
그때, 월맹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준비하여 국내 문제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남을 돕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린다. 이후 수많은 반공지도자와 반공언론인이 암살되었으나 언론은 침묵한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총공세를 시작하고 같은 해 4월 29일 월맹 공산군이 월남 수도 사이공을 포위했으나 이미 월남의 국운은 기울어 있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은 월남 대통령궁을 점령하면서 월남은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다.
진짜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월남의 군인·경찰, 종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 수용소로 잡혀갔고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이러한 학살의 현장에서 배를 타고 해외로 도망친 보트 피플(Boat People)은 100만 명을 넘었으며, 이 중 11만 명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월남 패망 직전 티우 대통령은 국제적인 지원을 외쳤지만,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을 어느 나라도 돕지 않았다. 자국의 안보를 유지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월남 패망을 보면서 알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여러 가지 약점이 있을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아쉬운 점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국민의 안보의식 만큼은 철저하게 교육해야 하고 강화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는 앞서 월남 패망사를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점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이런 안보의식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지 않아 안타깝다. 자라나는 세대와 기성세대의 단절도 이런 교육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기피나 군대 내 동성애 허용 논쟁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는 것도 안보의식의 약화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각종 첨단무기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지원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줄어든다면 우리나라도 월남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국가는 군사력이 아닌 애국심이 지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위 글은 교회신문 <21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