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2-08 10:28:28 ]
자신을 위한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 구별해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야
이야기 한 토막. 할아버지가 한 분 살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홀로 된 지 꽤 오래되다 보니 사람이 그립고, 또 외로웠다. 어느 날 철새 한 마리가 앞마당으로 날아 들어왔는데 할아버지는 이 새에게 먹을 것을 잔뜩 마련해주고 보살펴주었다. 철새는 힘들지 않고 먹이를 잔뜩 얻을 수 있는 할아버지 앞마당을 자주 드나들었고, 철새와 할아버지는 그렇게 서로 의지하게 됐다. 그렇게 둘은 사랑과 정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는데 철새는 그 무리와 함께 남쪽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먹을거리가 많은 할아버지 앞마당을 늘 드나들 뿐이었다. 철새 무리가 모두 남쪽으로 이동한 초겨울에도 그 철새만은 할아버지 앞마당에 그대로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 철새를 위해 지붕 처마 밑에 둥지를 마련해주고 여전히 먹을 것을 공급해줬다. 그런 어느 차가운 겨울날. 할아버지는 그만 생을 마감하게 됐다. 철새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면서 남쪽으로 날아가려 했지만 바람이 너무도 매서워 날 수가 없었다. 결국, 철새도 그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미국의 유명한 성직자 브룩스 목사(1833~99년)는 중병에 걸렸을 때 친구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변호사 겸 정치인이던 친구 로버트 잉거솔의 방문만큼은 허락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거절하면서 나만 특별히 문병을 허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잉거솔이 묻자 브룩스 목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죽더라도 다른 친구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네. 그러나 영원한 세계를 믿지 않는 자네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만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날 잉거솔은 충격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앞선 이야기에서 할아버지는 분명 철새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둘은 분명히 그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섬겼으며 서로 의지했다. 그러나 끝은 좋지 않았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했으며 서로 사랑했는데 왜 그 끝은 좋지 않았을까.
그것은 할아버지가 베푼 사랑은 철새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사랑일 뿐이었다. 외로움을 달랠 사랑을 찾았을 뿐이다. 그것은 작은 사랑이다. 그리고 혹은 나쁜 사랑이기도 하다.
둘째 이야기에서 브룩스 목사는 지금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친구의 영혼을 걱정하여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자신의 처지는 생각지 않고 오직 친구의 영혼만을 생각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위대한 친구 사랑의 조건이다. 나는 어떻게 되든 너는 살아야 한다는 정신.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사랑에도 큰 사랑이 있고 작거나 혹은 나쁜 사랑이 있다. 모두 큰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작은 사랑이 쓸데없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위대한 사랑은 따로 있다.
성경은 이미 이 위대한 사랑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이 세상에 숱하게 범람하는 사랑이야기. 유행가 가사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사랑이지만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는 모두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것임을 당부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그러나 우리는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자신의 이기심 하나, 즐거움 하나 희생하지 않으려 든다. 나만을 위한 사랑만 찾고 나만을 위한 희생은 알아도 상대를 위한 배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상대의 더 나은 행복, 상태, 혹은 유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행할 사랑의 정의다.
마지막 이야기 하나 더. 독일에서 활약하던 유대인 여성 윤리학자 마틴 니벨라는 히틀러가 나타나서 유대인을 집단 학살하는 참극을 바라보면서 ‘저들은 복음을 들을 가치도 없고, 구원받을 가치는 더욱 없다. 그러므로 저런 사람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도무지 없다’라고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히틀러가 지옥행 처분을 받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히틀러가 큰 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진지하게 전도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 억울하다는 내용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마틴 니벨라는 크게 각성하고 회개를 했으며, 그 이후 독일인에게도 평생토록 많은 전도를 했다.
올 한 해 참으로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가 많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힘들고 나약하고 핑계를 대더라도 우리 기도의 제목은 언제나 ‘영혼 구원’에 있다. 영혼 구원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에게 베푼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내년에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작은 사랑에, 육신에만 치중하는 작은 사랑에 머물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나눠줄 수 있는 큰 사랑에 매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