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2-22 13:28:46 ]
혼자 밥 먹는 것은 별로 좋은 경험이 못 된다. 혼자 된 것도 민망한데 마치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처럼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부담스럽다. 이렇게 혼자 식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을 ‘런치메이트(점심 동료) 증후군’이라고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이 증상이 더 심해서 혼자 밥 먹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 화장실에서 밥을 몰래 먹는 대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이에 못지않게 성탄절을 남들처럼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혼자 우울하게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탄절 증후군’도 있다.
성탄절 증후군
성탄절을 앞둔 요즈음이 이 증후군이 시작하는 때인데 이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동안 잊고 지낸 친구들에게 열심히 전화해서 약속을 만들거나, 선후배 모임 자리를 부지런히 찾아다닌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히 올해 성탄절도 혼자 보내게 될지 모를 걱정 때문이다.
또 연인이 없는 솔로에게 이 증후군은 더 심각하다. 그래서 ‘솔로부대’라고 자칭하는 이들은 이 증후군을 이겨내려는 방법을 공유하는데 그 중 엽기적인 것이 ‘수면법’이다. 성탄절을 앞둔 며칠 전부터 잠을 자지 않고 참고 있다가 12월 24일 11시 59분부터 정신없이 쓰러져 자서 26일 아침에 일어난다. 이를 위해 수면제까지 공동구매 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도 있다고 하니 그냥 우스갯소리라고 지나치기에는 좀 심한 것 같다.
하나님 상실 증후군
사람들은 이렇게 혼자 되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오히려 더 고독을 크게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세상에서 어떻게 내가 지금 바보처럼 혼자가 되었을까? 남들은 행복한데 나만 왜 혼자 불행한가?’라는 자기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고립될 것을 염려하고 또 그 모습을 감추려고 하다 보니 현대인들은 더 고독하다. 이 모든 고독의 원인은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공허감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은 영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는 아무리 행복하려 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없고, 아무리 즐겁게 웃어도 내 영혼의 슬픔은 감출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못한 데서 오는 결핍증과 하나님을 잊은 채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상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예수
그런데 우리 인간보다 더 고독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온 세계가 즐거워하는 성탄절에 가장 고독한 분이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상황이 그렇다. 예수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라고 하지만 태어난 곳은 초라한 마구간의 말구유요, 신분은 목수의 아들이었다. 축하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죽이기 위해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이 헤롯 왕에 의해 싹 죽어야 했으니 예수의 탄생이 수많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날이었다.
그 이후로도 예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목숨을 위협당하며 쫓겨 다녀야 했다. 오죽하면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을까? 결국 예수는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 위에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였고, 함께한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고,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아야 했다. 십자가는 예수의 고독한 생애의 절정이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 오셨다는 이유로 고독했고 이 세상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고독하였다. 오늘날 성탄절이 세상 사람들에게 흥청망청 노는 날로 전락한 것도 “예수가 태어난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라는 비아냥거림과 무관하지 않다.
임마누엘의 약속
예수께서 이렇게 고독한 생애를 살면서까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는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상상한 ‘임마누엘’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이스라엘이 세계 중심에 서는 시오니즘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정도의 상상도 그들에게는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상상을 벗어났다.
임마누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도 아니었고 오늘날 예수를 이해하는 것처럼 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박애주의를 실천함도 아니었다. 오직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내 영혼에 이루어질 임마누엘을 위해 오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함께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버리고 나를 위해, 나와 함께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때부터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가 예수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내 영혼의 그릇임을 발견한다.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예수의 생애가 하나님에게서 고립된 나를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성탄절을 혼자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만나면 된다. 내가 얼마나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나를 위해 나와 함께하기 위해 오신 예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없어 고독한 솔로들이여! 예수를 사랑하는 친구로, 연인으로 만날 최고의 성탄절을 놓치지 말라. 지금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하라.
위 글은 교회신문 <22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