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1-19 16:52:24 ]
어른과 젊은 세대 간 ‘소통’도 중요하지만
바른 생각과 정신 심어주는 노력도 필요해
학창시절 깐깐한 선생님을 우리는 ‘꼰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꼰대’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일단 나이로 5060세대면 꼰대에 해당한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꼰대’란 ‘자기가 고생한 이야기를 자랑처럼 자주하고, 자기가 만든 틀에 젊은이를 자꾸 끌어들이려 하고, 자기 말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잔소리와 간섭이 많은 사람’이다. 예전에는 슬슬 피하는 것이 다였지만 이제는 분노한 젊은이들이 꼰대들을 몰아내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사람을 평가할 때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는가?’를 중요시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꼰대’가 아닌 멘토가 환영받는 시대다. ‘꼰대’와 ‘멘토’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취업난으로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당장 문제는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위로하면서 관심을 두고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면 ‘멘토’다. 그런데 만약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편안한 일만 하려고 한단 말이야. 매일 5000원짜리 커피 마시고 80만 원짜리 핸드폰 주물럭대면서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물어보면 누군들 답이 나오겠니?”라고 하면 ‘꼰대’가 된다.
꼰대를 향한 거부감이 경멸과 모독에까지 이른 것은 기성세대와 소통이 단절된 데서 온다. ‘소통’은 ‘공감’에서 시작한다. ‘꼰대’와 ‘멘토’의 차이는 한마디로 공감의 능력에 있으며, 곧 태도의 문제다. 그러므로 소통과 공감을 하려면 기성세대도 눈높이를 낮추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나이를 초월하여 섬기려는 자세로 접근해야 꼰대의 이미지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꼰대들을 화나게 하는 자들이 있다. 꼰대가 아닌 것처럼 가장한 가짜 ‘멘토’들 때문이다. 그들은 젊은이의 구미에 맞는 달콤한 말로 립 서비스를 무한 제공한다. 한 수 더 떠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거들고, 불만과 분노를 부채질한다.
그들의 전략은 이렇다.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춰라. 눈높이에 맞춰라. 지적 수준에 맞춰라. 말투도 흉내 내라. 태생이 점잖다면 스스로 경박해지도록 노력하라. 육두문자와 막말의 민망함에 비례해 인기가 올라간다. 괴담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열광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Podcast, 아이팟(iPod)과 방송(broadcast)의 합성어) 방송이다. 젊은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매체를 통해,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포맷으로 포장하여 대통령을 욕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다. 그들의 공격대상은 현 정권과 주류 언론이며 특정종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이 너무나 분명히 정치적임에도 젊은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꼰대라고 비난받을지언정 잘못된 일에는 쓴소리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멘토다. 주책없는 꼰대도 문제지만 꼰대 정신의 부재(不在)도 걱정이다. ‘사실은 꼰대가 없다’는 어느 기자의 칼럼은 기성세대의 이런 불편한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어느 세대나 기성세대는 항상 후세대에 말이 안 통하는 ‘꼰대’였다. 하지만 그 시절 꼰대는 어른이면 어른다워야 하고,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비춰 젊은이들을 옳은 쪽으로 가르치려 했고, 이들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대적 책임감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대의 반항과 마찰음도 있었지만 어떤 불순한 의도로 젊은이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을 자신의 이익과 인기를 위한 도구로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 한편에는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뒷전에서만 ‘어휴, 저 꼰대’라고 속삭였을 뿐이다. 비록 우리와 다르지만 ‘꼰대’가 옳을 수 있다고 내심 인정하는 바가 있었다. 지금은 젊은 애들의 심기를 살피고 영합하려고만 한다. 사실상 꼰대가 없어진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7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