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뒤에 숨은 고독

등록날짜 [ 2012-04-25 09:14:52 ]

지치고 힘들어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인생
성경을 통해 인생의 참목적 바로 알고 가지길

1980년대 조용필 씨가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내레이션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이 노래의 작사자 양인자 씨는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가사를 썼다고 한다. 헤밍웨이 소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킬리만자로의 정상 부근에 얼어 죽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할 길이 없다.”

킬리만자로는 만년설로 덮여 있으며 높이가 5895m나 되는 아프리카 최고봉이다. 실제로 그런 산에는 산소가 희박해 정상에 표범 같은 동물이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여하튼 조용필이 노래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세상이라는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상처받고 사랑에 배신당하면서도 끝내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고고하게 자신의 길을 가려는 인생을 그려내고 있다.
 
남자들이 이 노래를 애창하는 이유는 짙은 고독 속에서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성공을 바라보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하고 노래 부를 때 얼마나 멋져 보이는가?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우뚝 선 표범, 생각만 해도 괜찮은 그림이다.
 
그런데 예전에 그렇게 멋있게 느껴지던 이 노래가 이젠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는 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왜 묻지 말라고 했을까? 모르니까 그렇지’라는 질문과 대답이 계속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다 점점 ‘묻지 마라’는 그 소리가 오히려 ‘인생에서 가치 있다고 믿었던 사랑에, 내 꿈과 이상에 모든 것을 걸었더니 남는 건 외로움뿐, 그때부터 삶의 목적을 잃었어요. 제발 왜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하고 요청하는 갈급한 영혼의 절규로 들려왔다. 그러자 노래 마지막 부분,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라는 가장 멋진 내레이션도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고독의 상처를 또다시 고독으로 치유하려는, 죽어가는 표범의 마지막 신음처럼 들렸다.

그렇다. 우리 인생이 고독한 것은 목숨 걸고 열정을 다 불태울 만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해서다. 정상에 올라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과 고독만 더 커질 뿐이다. 모두 물음표를 남겨 놓고 왜 올라왔는지도 모르고 죽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까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고 말씀하셨다. 곤고한 날, 인생의 고독을 절실히 느끼는 그때가 예수가 절실히 필요한 때요,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또 이렇게 부르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고독한 질주를 중단하고 나와 함께 가자고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고 계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전히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전하시는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만나기를 바란다.

위 글은 교회신문 <28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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