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등록날짜 [ 2012-07-24 13:51:42 ]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 잊어버리지 말아야

많은 사람이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막상 결혼하여 부부로 사는 것이 연애할 때와는 달리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 후 3주 동안은 서로 연구하고, 3개월 동안 사랑하고, 3년 동안 싸우고, 30년 동안 참으라”는 말도 있다. 결혼 전과 후에 사랑을 인식하는 차이가 이렇게 큰 데도 사람들은 자기만은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자신하며 사랑도 하고 또 결혼도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사랑할 대상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고 말씀하셨다. 무척 파격적인 대우다.
우리 인간은 이런 큰 사랑을 하나님께 받았는데도 마치 남녀 간의 사랑이 결혼 전후에 달라지듯이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도 역시 처음과 나중이 차이가 있다.

이제 막 예수를 믿고 은혜 받을 때는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할 때부터는 자신을 주님께 맞추려다 보니 버려야 할 것도 많고, 포기할 것도 많다. 결국, 이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 외에도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도 있고,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섬기는 신비주의자도 있으며, 기복신앙에 치우친 자도 있다. 이들은 다 하나님을 잘못된 방식으로 섬기고 있다.

그러나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은근슬쩍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에서 발을 빼는 사람도 있다. 극단적으로 예정론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간이 감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높이 치켜 세운다.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올려놓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예정하셨기에 우리의 구원은 물론 그 이후의 삶까지도 영원히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너무 완벽한 분이어서 사랑하는 것조차 무례하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수준에 맞지 않은 너무 완벽한 신랑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격차를 줄이려고 주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지 않았던가?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상대’로 저만치 밀어 놓고 그저 사랑만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솔깃하게 들리면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자신에게 너무 힘겹거나, 신앙생활에 싫증이 났거나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기대하는 사랑이 그런 것일까? 사랑은 상대적이다. 사랑하면 상대를 향한 기대감과 아쉬움이 수시로 교차하기에 항상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고, 신뢰를 주고 싶어서 어떤 방법으로든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결혼한 후에 부부간에 나누는 사랑은 이보다 더 넓고 깊다. 인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무슨 일이든 함께 책임지며 서로 사랑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도 이런 것이다. 서로 부대끼며 모든 인격을 총동원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최고 절정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에 행함으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드로에게 묻듯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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